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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ITY/두 손을 모으다

영성, 하나님의 공동체 일원으로 살다 l 유경재 목사


“하나님은 개인적이시지만 사적이지는 않으시다” 짐 윌리스
가 쓴 <하나님의 정치>의 한 대목이다. 다시 풀어 본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개인적일 수는 있어도 그 관계가 사적관계를 넘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처해 있는 사회에서 공적 영향력을 끼칠 수 밖에 없다는 말 아닐까. 한국 교회, 특히 보수적 교리를 전제한 장로교단 내에서 정치 책임, 공적책임, 사회 책임의 이야기는 영성 저 밖의 이야기로 치부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영성은 곧 개인적이었고, 사적이었고, 경험적이었고, 굳은 마음으로 탈속을 결심해야 했다. 1970-90년 민주화의 진통이 온 나라를 흔들 때 개인적 영성을 넘어 사회와 공적 영성의 소명을 불러 깨웠던 안동교회 유경재 원로목사를 만났다.

 

 


유경재 하면 몇 가지 생각이 드는데 첫째는 올해로 102년 된 안동교회다 그런가! (웃음) 사실 안동교회는 나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곳이다. 할아버님이 창립 멤버셨고, 그곳에 손자가 담임 목사로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버님께서도 출석하셨다. 아버님은 교회 개척에 헌신하셨는데, 그러니 자연히 나는 중국, 부산 등지를 아버님 손에 이끌려 다녔다. 8형제인데, 그 중 목사는 한 명쯤은 나와야 하지 않겠나 기대하셨는데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한 셈이다(웃음). 또 두 번째가 바로 정치에 대한 신념과 행보다 글쎄…(생각) 내 설교는 대부분 보편적인 설교였는데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한 것과 이러저러한 모임에 참석한 것 때문인가 보다. 사실 나에게 그러한 행보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어찌 보면 영성, 신앙, 교회의 모든 양상과 목표와 그림은 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공동체에 담겨 있다고 볼 수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궁금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라 하겠다. 엄밀히 말해 모든 이단은 이 삼위일체를 어떻게 고백하고 인식하느냐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거다. 그만큼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중요하고도 핵심이다. 그런데 개신교는 말하려 하거나 설명하려는 것을 좀체로 하지 않는다. 나는 삼위일체는 생명 공동체라고 본다. 삼신론에 빠지지 않고, 단일신론에 빠지지 않는, 하나를 이루고 계신 삼위일체의 개념이 필요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동체다. 사람은 여기서 이탈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를 하나님 편에서 해결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 공동체 속으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이것이 역사에서 드러나는것이고. 이 공동체가 역사 인식, 사회 참여와 연관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뜻은 역사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국 교회의 어려움은 이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역사 인식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너무 쉽게 적용한다. 쉽게 아브라함처럼 살라, 다윗처럼 살라에 집중한다. 그렇게 강조하고, 그렇게 영성을 추구하게 하고, 경험하게 한다. 그러니 당연히 성도들도 그런 것만 추구한다. 개인적 구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니겠나.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이루려는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전체 성경의 역사에서 다윗은 어떤 지점에서 빛 을 발하고 있는지. 이걸 고민하고 설교와 영성에 풀어내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래야 영성이 비로소 사회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고, 생명력 있게 활동하는 것이다. 이 둘이 어떻게 연결점을 찾을 수 있는가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과정이 성도의 영성과 신앙이라 하겠다. 그것의 장이 현실이고, 그 현실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큰 과정에 속한다.
그러니 성도의 목표는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찾아내고, 그 찾아낸 뜻을 어떻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 펼쳐 낼 것인가에 안착해야 한다. 이것의 귀착이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셈인 것이다. 그렇담 공동체의 어려움에 동참하고, 사회의 아픔을 함께 고통하고, 느끼고, 그것에 참여하고, 인권과 민주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 아닌가(웃음). 사고가 유연하시면서도 자유스럽다 그래 보이나(웃음). 아마 이 자유스러움은 신학교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목회학 석사M.div과정 1기다. 말썽도 많이 피고, 교수님들께 많이 따지기도 하고,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좋았지만 돌아다니며 여러 강좌를 듣는 것이 좋았다. 졸업 후 경산중고등학교 교목으로 있으며 더 큰 자유로움을 맛봤다(웃음). 기존 교회로 바로 갔으면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많이 접했다고 할 수 있겠다. 신학 공부의 습관을 들이고, 자유롭게 종횡하는 태도를 익혔던 시절이다. 그것이 목회에도 많이 드러났겠다 안동교회는 대표적인 보수교회였고, 처음 부임했을 때 당시 한국의 여타 다른 교회의 성장에 비해 침체해 있었다. 좀 잘해보고 싶었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했다. 특히 기독교 문화, 교육 등에도 관심을 두고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 성화, 파이프 오르간, 종鐘을 설치하기도 했다. 지금은 없지만 토요일 오후 1부 예배, 여성 장로 등 하나하나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세상과 기독교 문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자 꾸준히 마음을 두고 실행에 옮겼다. 나로서는 이런 것들이 모두 내 영성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쓰신 책을 보니 목회 후반부에는 꽤나 생명에 대
해여 천착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닌데(웃음). 생명은 개체 생명이 중요할지 몰라도 정작 그 자체에 공동체성을 함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존재 방식이 그러하다. 개체는 생명이 있지만 절대로 개체로 존재하지 않고 유기적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이루고 있을 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론은 그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의 단위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장교수는 개인 생명은 혼자 있을 수 없고, 이웃과 다른 동식물의 개체들을 동반해야 한다 했다. 나는 목사니까 거기서 하나를 더 물어야 한다. 이것은 과학적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온생명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국 커다란 생명 공동체도 하나님의 생명 공동체 속의 한 단위로서 포함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기독교에서 생명을 다룰 때에는 우주적 생명 공동체 속에서 개개인의 생명을 다루어야 하고, 그 때에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 아니겠나. 여기에서 영성이 잇닿아 있는 것인가 보다 옳다. 개인 구원, 개인 영성에서 좀더 완성된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생명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과정이 성도의 영성과 신앙이라 하겠다. 그것의 장이 현실이고, 그 현실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큰 과정에 속한다. 그러니 성도의 목표는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찾아내고, 그 찾아낸 뜻을 어떻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 펼쳐 낼 것인가에 안착해야 한다.

한국 교회 성도의 영성도 이런 부분에 영향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 기독교는 교리에 너무 집중했다. 필요한 부분이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그 부분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970년대 후반이다. 교회 성장을 이루다가 그것이 아닌 내적 강화가 필요하다 생각하기 시작했고 영성 이야기가 많이 대두되었다. 영성 그러면 버뜩 성경 보고 기도하고, 방언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러기 위해서 기도원, 산 등을 찾았다. 혼자는 절대 의미 없다. 궁극적 하나님의 공동체에 어떻게 연합하고 참여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전체적 공동체를 이루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영성 추구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며, 그 찾은 뜻에 어떻게 참여하는 것인가, 그 생명 공동체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이다. 2004년에 조기 은퇴하신 걸로 안 그렇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내 자신 속에 있는 욕심을 내려 놓는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교회에서 30년 가까이 정확히 28년을 섬겼는데, 내가 잘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무바라크도 30년 했다는데…(웃음) 그게 좋다고만 할 수 없다. 사실 일찍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렇게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웃음).
다른 말로 하면, 목사들이 착각을 할 수 있다.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교인들이 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을 한다. 조금 더 했으면 여러 일들을 했겠지만 그런 것보다 후배를 위해 내 주는 것도 좋은 거니까. 은퇴 후 어떻게 사는 전혀 후회되는 것 없다. 자유롭고 좋다. 늦게까지 자니까 좋다. 요즘은 예수 기도한다. 단순화해서 기도하는 것이 지금은 좋다. 새벽에 일어나면‘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다. 이기도 방법은 많은 말 대신 담백한 언어로 여러 대상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고,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대략 3000번 정도 반복하며 기도하는 것 같다. 또한 한국 교회 자료 보존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은 세상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에 현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언제 또 변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조심스럽고 염려스럽다. 얼마 전‘세시봉 콘서트’를 보았다. 소위 아이돌이라 일컫는 가수들이 부르는 것 못지 않게 사랑을 받았다. 급격하게 변하는 세태와 흐름에 자신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폭넓게 사람과 세계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히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신앙이 있지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너무 일방적으로 묻고, 공식화하고, 확정 짓는 듯한 물음에 염증을 느낀다는 것을 보았는데, 젊은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그런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성 추구의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다.


시대 그리고 공동체, 그리고 성경은 유경재 목사에게 있어서는 지금도 화두고 주제고, 영성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혼란한 시기를 한국이, 한국 교회가, 젊은이가, 한국 교회 젊은이가 겪고 있는 이즈음에 한 원로 목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천천히 복기하게 만드는 예언자적 메시지였다. 그 큰 울림이 내 몸과 이 사회를 흔들어 진동하고, 깨워 행동하게 하기를. 글 사진 김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