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God을 주제로 책을 쓴다는 것은 목회자의 일만 아니다.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 신을 주제로 담론을 전개하고, 세상에 풀어 소통하였다. 최근엔 리차드 도킨스, 알리스터 맥그라스 등이 있다. 생물학 전공자인 데도 신을 논했다. 그만큼 신이라는 주제는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 신에 대한 언급은 특별한 소명자들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요즘 기독교 내 소통 방식에 회의를 느끼는 젊은이들의 이탈은 어쩌면 신에 대한 주제가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꾸준하게 철학적 주제를 문학, 영화 등을 통해 쉽게 풀어 글을 써온 작가 김용규. 최근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를 만났다. 글·사진 김준영

이번에 굉장한 책을 냈다. 신God을 다루었는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조직신학에서 ‘신론’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인문학적으로 풀어서 쓴 책이지요. 기회가 된다면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같은 방식으로 풀어 쓰고 싶습니다.

해박한 철학 지식뿐 아니라 깊은 신학적 주제에 감탄했다 저는 1982년
4월에 철학을 공부하러 독일의 남부도시 프라이부르크로 떠났습니다. 햇볕이 따뜻하고 슈바르츠 발트라는 산림지대 기슭에 자리하여 아름다운 이 고장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의 하나인 프라이부르크 대학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신학과 철학이 강한 이 대학은 20세기 독일철학의 두 거장인 후설과 하이데거가 강의한 곳이기도 하지요. 그곳에서 플라톤과 하이데거 철학을 주로 공부했습니다.
1987년 겨울학기부터 튜빙겐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는데, 그 이듬해인 1988년 여름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생각). 죽음의 목전에까지 다가갔던 그 사고로 많은 것을 잃은 이후, 삶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학적 관심도 철학에서 신학으로 바뀌었지요. 그 이후 신학에 몰두했지요.

지금은 자칭 전업주부 작가로서 사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어 고등학생
때까지 만해도 이과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입시에서 낙방한 후 재수를 했지요. 그 시절 철학책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뜻하지 않던 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철학과 출신이 취직이 잘 안 되기는 지금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졸업 후 유학을 떠났는데, 그 당시 꿈은 철학자였습니다. 그런데 귀국 후에도 역시 취직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반면에 피아노를 전공한 처는 취직이 되어, 제가 살림과 아이 기르는 일을 떠맡아 했지요. 처음에는 일이 년만 하고 뭔가 다른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왔습니다. 한 때는 사회에 나가 뜻대로 살아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안타깝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이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나이가 예순쯤 되고 보니,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제 삶에도 제가 모르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업주부의 일이 할 만한가. 재
미있는 백수 찬양론도 유쾌하다 전업주부는 한마디로 고단합니다. 가정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고들 하지 않습니까(웃음). 저도―다른 주부들이 그리하듯이―식구들 중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 밤에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도 주변에는 ‘특별히 하는 일(직업)이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서, 여기저기에서 사소한 부탁이 자꾸 들어오는 등 돌발적인 일들이 빈번하게 생깁니다. 그래서 여간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책을 보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기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가사家事에는 본디 봉급이 없기 때문에 ‘자기 시간’을 내서 뭔가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결코 할 만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더 큰 문제는 가정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프리랜서는―설령 그가 수입이 적거나 아예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잘하는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백수’이지, 일하길 싫어해서 노는 ‘건달’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예수,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모두 프리랜서이자 백수지요. 이런 사람들이 더 바쁘고 더 힘들게 사는 법이예요(웃음).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프리랜서들을 ‘건달’로 보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이 그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들지요. 현대사회가 점점 더 많은 프리랜서들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발전해 가는 만큼, 프리랜서들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야 할 때입니다.

영성은 현대
인들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영성이 대두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현장과 현실에 영성이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적 주제로 신을 탐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기독교 교리 안에 있는 구원의 메커니즘은 칭의와 성화이지요. 둘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뤄지지만,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죄성에 의해서 신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고, 성화는 “그의 영에 의해서 무죄하고 순결한 생을 지향”하는 것입니다(<기독교강요>, 3. 11. 1) 따라서 ‘죄사함’이라고도 하는 칭의는 “용서하시면서 동시에 의인화” 하시는 하나님의 일회적이고 주권적 사역이고(<기독교강요>, 3.11. 11), 중생이라고도 부르는 성화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전 생애 동안” 행해져야 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이지요(<기독교강요>, 3. 3. 8).
그렇다면 ‘구원의 제도’로서 교회가 맡은 일은 당연히 칭의가 아니고, 성화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신자들에게 마치 칭의를 줄 수 있는 것처럼 하며 정작 성화를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려는 것이자 주어진 직무를 유기하는 거지요. 이 점에서 볼 때, ‘양적 팽창’에만 몰두해 ‘영적 성숙’을 등한시한 한국교회도 크게 각성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기독교 신학, 특히 개신교 신학 안에 성화의 메커니즘과 제도적 장치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성화해야 하는 사명이
교회에 주어진 것이 맞다 문화는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동시에 그것을 이끄는 ‘나침반’이지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 시대 문화를 만들고, 그 시대 문화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성화된 삶이 성화된 문화를 만들고, 성화된 문화가 성화된 삶을 만든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문화를 성화해야 하는 일이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문화가 성화되지 않으면 사람들의 삶이 성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문화선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제 생각에는 문화선교를 ‘문화를 통한 선교’, 즉 문화 현장에 나가 선교를 하자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문화의 성화를 통한 선교’, 다시 말해 문화를 성화함으로써 그 문화가 만드는 사람들의 삶을 성화하자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하지요. 그러면 선교는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 영화, 문학 등을 통해 어려운 철학적 주제를
이야기한 작업 과정이 의미가 있겠다 영화나 문학이 철학적 또는 신학적 담론을 풀어가는 데 좋은 매개체인 것은 사실입니다. 철학이나 신학적 담론들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전개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반해 영화나 문학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주제를 표현하기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이 같은 일을 하는 이유 가운데 다른 하나는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영화나 문학에 담긴 메시지를 철학적 또는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요, 우리는 영화나 문학 작품을 철학적 또는 신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폴 리꾀르가 말한―‘작품 앞에서의 자기 이해’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즉, ‘나도 저 사람처럼 살겠어’ 또는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어’와 같은 자신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찾는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나 문학 작품을 ‘기독교적 또는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훈련’이지요. 저는 그 같은 의도를 갖고 <영화관 옆 철학카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그리고 <데칼로그>를 썼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오늘날 젊은이들은 정보에만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문명의 흐름인 만큼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때문에 젊은이들이 사유思惟를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요. 그러나 사람이 사유를 하지 않으면 ‘기계화’로 전락합니다. 사유만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과 사건들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계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작동하지만 사람은 정보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삶의 무의미성’, ‘가치의 혼란’ 등의 문제들이 바로 여기에 기인합니다. “사유되지 않은 삶은 무의미하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정정 : 3-4월 호 본문 중/ 104년 → 102년/장신대 교목 → 경신중고등학교 교목)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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