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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당신을 공상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ㅣ SF장르를 논하다

I’m your father(스타워즈)이든, I’ll be back(터미네이터)이든, I see you(아바타)든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신이 솔직하게 터놓는다면 한번쯤은 열광했었던 SF 영화가 있었을 것이다. 많은 패러디와 우스갯소리, 그보다 많은 후일담을 낳으며, 화려한 특수 효과를 필연적으로 끌어 들이는 그 영화 말이다. 장르의 속성 때문에 관객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그 세대의 SF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지금의 시선으로 보았을 땐 조악한 연출이더라도, 당시 관객의 눈과 귀를 완전히 사로잡았음은 명백하기에 굳이 이를 입증할 증인들까지 불러들이지는 않기로 하자. 우리네 아버지와 삼촌들은 지금 사회의 주역이라 바쁘시니까. SF라는 장르에 있어서 영화가 대중에게 끼친 영향은실로 엄청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수많은 관객을 동원한 유명 블록버스터치고 SF 아닌 걸 찾아보기 힘든 것은 사실 아닌가. 다들 좋네, 싫네 해도 한 번씩은 봤다. 무덤을 파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걸 가지고 굳이 소수의 취향이랄 것도 없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계속해서 소비되는(게다가 가끔 말도 못할 정도의 대박을 치기도 하는)게 시장 속 SF영화 현실이다.

SF 같은 것만 아니면 돼요
소개팅 자리에서 SF 영화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둘 다 안 좋아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안 좋아하거나. 두근대는 첫 만남의 장에서 개인의 취향 차이만 확인하고 싶지 않다면, 이 낮은 확률에 배팅을 하는 것은 웬만하면 자제하도록 하자(뒤늦게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소개팅에 실패한 건 SF 때문은 아닐 테니까). 많은 관객 동원에 비해, SF는 사람들의 호불호가 명백히 갈리는 장르이다. SF가 주는 비약적인 비현실성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치함이 될 수가 있다. SF가 탐탁지 않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보면 표현만 다를 뿐 그 뜻은 대부분 ‘유치해’이다. 실존하지 않는 개념과 기술,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배경. 사실, 당연하듯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힘든 일이다.

너도 나도 SF, 우리 모두 스펙터클
이유가 있으면 SF, 이유를 모르면 판타지랬던가. SF라는 장르적 특성상 조금만 비현실적인 내용이 들어가 버리면 사람들은 SF라는 틀 안에 넣고 입구를 조여 버린다. 화려한 게 잘 팔리는 세상이니, 너도 나도 번쩍번쩍. 우리 모두 SF다. SF라는 단어에서 ‘~맨’ 시리즈가 연상되고 유치짬뽕이 곱빼기로 생각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일반적인 기준에서다. 분명 그 뭐시기맨들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요소가 넘친다.) 기술의 속도는 가속을 거듭하며 어느덧 인간의 속도를 멀찍이 따돌려 놓았으니 바야흐로 SF의 전성기다. 코믹스에 등장하는 모든 영웅들이 그럴싸한 CG옷을 입고 스크린을 종횡무진 한다.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생생한 CG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일주일 후에도 그럴까. 길거리의 형형색색 네온사인처럼 요즈음의 효과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로의 몰입을 흐리는 장애물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재미는 있었는데 남는 게 없어” 처음의 감동은 또 다른 CG 속에서만 피어난다. 이러다 가벼움이 SF 고유의 특징이 되는 건 아닐는지. 자칭 SF영화 마니아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요즈음의 스펙터클 쓰나미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모두 화려하고 전부 다 가벼우면, 소는 누가 키우지?

밑도 끝도 없다고,
모르는 소리!

BBC에서 조사한 ‘20세기 최고의 영화’ 설문의 1위는 <스타워즈>였다. 2위는 <블레이드 러너>, 3위는 <카사블랑카>다. 시기상 <E.T>라는 당대 최고의 괴물과 함께 개봉하여 제 빛을 못 봐 비운의 명작이라 불린 작품으로 개봉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개봉 당시보다 더 주목을 받는다. 이미 원 없이 SF를 섭렵해 나가고 있는 관객에게, 이 영화가 과연 어떤 색다른 점을 보여 주었기에 아직까지 잊히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미 눈이 고급이 되어 버린 대중의 평가는 더는 감각에 머무르지 않는다. 미래가 주는 외부환경의 변화와 그 변화 속에서 변하는 인간의 내부, 그리고 그에 대한 가치의 재고와 반성이라는 농밀한 주제의식은 그야말로 SF만이 줄 수 있는 본질적이고 고유한 기능이다. 장르로써의 공상과학은 수용자로 하여금 공상을 하게, 혹은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요, 미덕이자 본질이다. 서울로 서울로 돈 벌러 간 오빠도 오빠지만 여전히 결국은 우직하게 소 키우는 청년이 우리의 밥상을 차려주는
셈이랄까. 결여되어 있던 진지함의 재고. 이 역시 호불호가 갈릴 문제이긴 하나, 적어도 유치하다고 도리질을 칠 이유는 아니지 않는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K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 왔다. 우리를 열광하게 하는 특수효과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무려 소설이다. Science Fiction. 본래 소설에서 시작한 이 최첨단 장르는 출판물의 발전 속도를 이미 몇 광년정도는 앞서 버린 영화에게 그 대표성을 양보한지 오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SF라는 장르중에서도 소설 분야는 특히 우리 대중들의 관심 밖이었다. 지금까지 굵직굵직한 문학상까지 두면서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SF 소설은 영화가 자극시키는 말초적인 화려함은 없으나 그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과학자의 두뇌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미래를 예언하는 동시에 미래를 반성할 수 있으며, 거기다가 장르문학 특유의 흡입력까지 갖췄다. 독자는 작품을 능동적으로 읽어 내려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느새 작가가 펼쳐놓은 미래 속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나가는 존재가 되어 있다. 모습은 미래이지만 여전히 현재의 도덕과 가치를 기준으로 사는 미래이다. 식상하고 유치해서 SF에 밑도 끝도 없는 거부감이 든다면, 지금 서점에 들어가 휴고상이나 네뷸러 상을 탄 아무 작품이라도 읽고 다시 이야기 하자. 오타쿠가 되기란 생각보다 참 쉽다.  글 주동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