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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연재 종료

그 중의 제일은 레어여라

삼겹살 노릇하게 구워먹는 재미가 인생의 낙이었던 A.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는 자칭 스테이크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립아이 스테이크에 굽기는 레어. “제가 좀 레어한 사람이라서요”라며 웃는다.

서늘한 첫 경험
한 친구는 A에게 빈사 상태에 빠진 연애세포를 살려주겠다며 소개팅을 잡아주었다. 약속 장소는 생전 처음 가는 패밀리 레스토랑.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자식이 배움이 짧아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 체면에 뭘 몰라서 망신은 당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들은 풍월로는 고기 먹을 줄 아는 사람은 레어를 시켜 먹는단다. 웰던으로 구웠다간 원재료가 소인지 껌인지 모를 정도로 질겅 질겅한 스테이크가 나오게 된다나. 소개팅의 순간보다 긴장되는 것은 종업원과 대담이었다. “레어로요.” 경직되지 않게 최대한 일상적으로 말한다.“ 손님, 레어는 핏기가 좀 많으신데요.” “아, 알고 있어요.” 다시 대답한다, 최대한 일상적으로. 고이 물러가던 직원이 가지고 들어온 건, 피범벅의 고깃덩이였다. 소개팅녀의 얼굴 표정을 보니 A가 먹으려는 게 바퀴벌레라도 되는 것 같다. ‘스테이크는 뭐니뭐니 해도 레어라며. 고기 좀 먹을 줄 알면 레어 시켜 먹는다며….’ 그건 적절하지 못한 허세였던 것이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와 노릇노릇 바짝 익힌 삼겹살로 오늘의 금전적, 심적 상처를 보듬는다. 그래 고기는 바짝 익혀야 제 맛이다.

본토 입맛은 으레 그런 것?
두 번째 스테이크는 영어 학원의 종강식이었다. 소수 정예로 실제 해외연수를 하는 효과를 보장한다는 회화 코스였지만 사실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그저 함께 수강하던 고운님을 보는 목적으로 다닌 학원이었다. 스테이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레어로 주문하는 분위기였다. 외국인 강사는 그걸 뭣 하러 물어보냐는 듯 레어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께름칙한 표정이 몇몇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외국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집단적 관용이 감도는 것이 적절하게 중화된 기운이다. 2년간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는 B가 역시 고기 먹을 줄 안다며 호들갑을 떤다. “스테이크는 레어죠. 확실히 본토사람이야.” 그러나 정작 B는 파스타를 주문했다. A 눈에는 일전에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닮은 그의 모습에서 진한 허세를 느꼈다. 세렝게티 초원의 수사자가 질겅이는 피투성이 고깃덩이가 떠올랐던 걸까. 거 참, 그렇게 있어 보이고 싶을까. 그걸 먹는다고 당신이 수사자처럼 멋져 보이는 건 아냐. 한편으로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살짝 뜨끔하긴 하지만, 뭐 어때. 그거야 지난 일이지 않는가. 오글거리는 손가락을 애써 곧게 펴본다.
화기애애하게 식사는 진행되었고, 문제의 레어 스테이크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맛있게 먹는 강사의 모습을 보니 붉게 물든 것이 왠지 맛있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하긴 왜, 붉은 색은 식욕을 돋우는 색이라지 않는가. 내가 먹으면 미개인 같고 외국인이 먹으면 미식가 같아 보이는 현실에 속이 쓰렸다. 음식도 T.P.O를 따져야만 하는 거냐는 물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강사는 고여 있는 핏물을 따로 버리지 않고 고기에 묻혀서 먹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누군가 서투른 영어로 묻는다. “그렇게 먹으면 맛있나요?”라고. “최고예요.” 그의 미소는 정말로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 오묘한 맛을 통달하다
그래서 A는 세 번째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조금 쭈뼛거리며 “서로인 스테이크로 주시고, 레어로 해주세요” 한다. “손님, 레어는 핏기가 좀 많으신데요.”“ 네, 알고 있어요. 한 번 도전해보려고요.” 스스로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점을 숨기지 않고 주문을 마치고 메뉴를 닫았다. 덜 구워서 그런가? 빨리도 나온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같은 핏덩이는 아니었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는 전혀 흠 없이 완벽한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칼을 대자마자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오듯 붉은 피가 쏟아진다. 참으로 주홍같이 붉구나. 하지만 저건 필경 육즙이렷다. 육즙! 확실히 씹히는 건 부드러웠다. 익히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부드러운 육질을 이제야 느낀다. 그렇다고는 해도 핏기는 뭔가 찜찜한 게 사실이었다. 광우병이니 구제역이니 뒤숭숭한 게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니 말이다.
와이파이 잘 터지는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이것저것 정보를 알아본다. “육즙과 피의 차이가 뭐죠?” 지식인 왈, “고기의 수분이 빠져나오는 겁니다. 모세혈관에 소량 남아있는 피가 섞이어 나오는 걸 육즙이라고 하죠. 고기를 먹을 때어느 정도 수분이 남아 있어야 씹을 때 부드러워지고 육즙에서 느껴지는 풍미도 생기는 법입니다. 잘 익힌 고기는 과일과도 같고, 무슨 고기든 간에 바짝 익혀 버리면 좋지 않아요.” 그건 마치 사과를 쥐어짜서 과즙을 빼내버린 후 남은 찌꺼기만 먹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칼질 한 번에 검색 한 개. 소고기 특유의 고소함과 부드러움은 수분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뭔가 식사라기엔 진지한 배움의 현장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검색 삼매경에 빠져 있자니 매니저가 난처한 표정으로 A에게 다가온다. “손님 고기가 입맛에 안 맞으세요?”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매니저는 말을 이었다. “레어로 주문하시는 고객님들이 더 익혀달라고 하시는 경우가 많아서요. 레어 주문이 들어와도 통상 미디엄 레어로 나오거든요. 저희가 다시 한 번 요리를 준비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오호라. 이 사람은 A를 외식 전문 블로거 쯤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미적 심미안으로 미묘한 고기 굽기의 차이에 의문을 품은 것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새 요리가 나오는 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사이드 메뉴 서비스까지! A는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한다. 더 익힌 고기보단 덜 익힌 고기가 좋은 이유. 덜 익은 걸 더 익힐 수는 있어도 더익은 걸 덜 익힐 수는 없다는 사실.

그 후 그의 스테이크에는 핏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글 주동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