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라 함을 자신의 믿음을 체화하려는 계획을 짜고, 실체적으로 어떤 무엇인가를 손에 잡으려거나 규칙화한 순서를 통해 어
느 경지에 다다라 정복해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가 추구하는 영성과 멀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 이질적이고, 샤머니즘적인 변질 영성이 참된 영성의 본질을 흩뜨리고, 오히려 참된 영성까지 멀게 느끼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안타깝게도 예수를 따라가는 영적 순례의 길이 점차 더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영성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참다운 그리스도교 영성의 담론을 꾸준하게 이어왔고, 그에 맞는 공동체와 모임을 이끌었던 김진 목사. 그를 겨울 초입에 서울 한복판에서 만
났다. 글 · 사진 김준영

행보가 너무 재미있다. 보수적 신앙이라고 일컫는 총신대학에서 신학을 한 후, 그 반대편에 있다는 한신대학에서 공부를 또 했다. 그 외에도 꽤 다양한 걸음을 걸었는데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다소 파격적으로 보일 수 있는 신앙 여정이지만 나는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느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 신학적 걸음을 돌아보면, 남들이 가지 않는 영역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이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물론 보
수와 진보 양쪽 모두에게서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내 신앙의 삶에서는 큰 장점이다. 그것은 신앙의 다양한 폭을 수용할 수 있게 하는 토대와 동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여정을 통해 신앙의 다양한 색깔, 신학의 다양한 측면을 보게 하셨다. 이런 내 삶을 간혹 지인들이 한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애정 어린 비판을 한다. 그러나 나는 한 우물을 파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하나의 우물만 파게 하게 하시되 하나님이 넓고 깊게 파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여러 다른 종교를 만나게 하신 것도 그 깊이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다양한 색깔을 덧입히는 과정에서 몇몇 중요한 지점이 있을 듯하다 여러 계기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86년도 스위스 라브리 공동체에서 생활이 중요한 촉발점이다. 그곳에서 공부하며 세계에서 온 젊은 기독교인들을 만났고,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좁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만 해도 그것에 내게는 꽤 큰 충격이었다. 책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성과 속이라는 2분법적 분리에서 벗어나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진리의 깊음와 넓이를 접한 것이다.
그리곤 독일 여행 중에 우연한 계기로 문익환 목사님의 <항소이유서>를 읽고는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총신대학 3학년 복학 직전 일이다. 문 목사님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이 내겐 너무나 큰 도전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또 다른 측면을 본 결정적 만남이었다. 그 계기로 예수 정신을 민주화, 정의, 평화 등의 화두에 적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과격한(?) 기독교 학생 운동권이 되었다. 그 후 문익환 목사님에게 감명을 준 함석헌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새로운 신학의 전환점이 되었다. 함석헌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 신학, 우리나라 역사, 종교에 관심을 품을 수 있었다.

문화신학, 종교신학, 영성 신학에도 꽤나 깊은 관심을 보이고 연구하셨는데 당시 나는 <그리스도와 문화>등의 리차드 니버의 책을 읽으며 그의 주제를 화두로 고민을 많이 했다. 우리 문화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우리나라의 정신적 뿌리를 알아야 했고, 우리나라 고전을 많이 읽으려고 했다. 그래서 한문을 좀 더 배우기도 했다. 내 주제는 우리나라 영성, 종교성, 문화성을 더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이지만 그 때 나는 다양한 것을 버무려 놓은 ‘샐러드 신학’이 아닌 ‘발효 신학’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신학과 문화와 종교가 더 깊이 만나 발효 되어 우리 몸에 잘 맞는, 한국인 정서와 문화에 잘 맞는 복음의 길과 내용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풀어내는 종교신학을 나아갔고, 영성신학은 종교신학의 여정에서 개신교 영성 부재를 절감하며 매진했다.

공동체 생활을 끊임없이 동경하는 듯하다 나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 이전에 필요에 의해 공동체 생활을 먼저 했다.
그리고 내 신앙의 꼴과 알짬은 공동체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제법 다양한 공동체를 경험했고, 거기서 공동체 삶의 쓴 맛을 많이 맛보았다. 그러면서도 공동체 대한 꿈은 버리지 않고 있다. 실제로 공동체 생활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은 초교파적으로 모인 ‘말씀과 기도’ 모임이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씨알수도회’라는 모임이 되었다. 그 모임을 통해 ‘렉치오 디비나(거룩한 독서수련)’를 꾸준하게 해왔다. 개신교 명상 공간을 표방한 <예수도원>의 개원은 개신교 수도 공동체를 위한 한 과정이었다.

수도공동체를 꿈꾸는 이유는
내가 의미하는 수도 공동체는 가톨릭 수도회의 모습이 아니라
좀 더 개방적인 삶의 공동체를 말한다. 영성 수련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기간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오고 갈 수 있는 생활 공동체다. 나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공동체로 믿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공동체적 역할을 하면 또 다른 생활 수도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로서 모습을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영적으로 갈급해 한다.
‘풍요 속의 빈곤’처럼 설교의 홍수 속
에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는다. 수도 생활 공동체의 시작과 역할이 여기에 있다. 일반 교회에서 채우지 못하는 영성 혹은 영성수련의 장으로 수도 생활 공동체가 필요하고, 이것은 결국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게 수도 생활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지금 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고백에 걸 맞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현장 목회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와 밀접한 교회, 교회 현장과 밀접한 공동체를 지향한다.

개신교 영성을 꿈꾸는데 가톨릭과 개신교 영성의 분기점은 무엇일까 전체로 보면 하나의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뿌리는 ‘ 예수 영성’이다. 예수 영성은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생활하고, 실천함으로 형성된 영성이다. 우리 영성 또한 이 예수 영성에서 삶의 양식과 지향점도 발견하고, 그 영성이 우리 안에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이 점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영성은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와 신학,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차이가 있는 만큼 색깔과 맛이 다른 부분이 있다. 이것을 단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영성신학에서 있어서 개신교 영성
신학은 가톨릭 영성 전통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오랜 교회와 수도 전통에서 형성된 가톨릭 영성은 개신교 영성의 또 하나의 뿌리이며 자양분이다. 개신교에서 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무시하는 듯하다. 무척 아쉽다. 그것은 자기 존재 근거와 뿌리를 자르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 가톨릭 영성을 그저 답습하고 반복하는 영성은 개신교 문화에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개신교만의 신학과 교회문화가 있는 만큼 개신교 영성은 나름대로 자기 전통과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 지점이 개신교 영성을 출발점 아니겠나 여기에서 개신교를 촉발한 혁명가들이었던 칼빈, 루터 등 초기 종교 개혁가들이 강조점을 다시 한 번 눈여겨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 성서다. 당시 사제가 독점했던 성서를 평민들에게 보급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종교 개혁가들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교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교회 조직, 사제, 위계, 전통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교회를 추구했다. 이것이 개신교의 영성이 지향하는 핵심이며 동시에 방법론이어야 한다.
가톨릭이라고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 지금도 부
분적으로 남아 있는 - 사제의 권위, 교회 조직 위계와 질서를 중요시하는 문화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직접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신교 신학에서 말씀 강조는 체감이 다르다. 나는 본래 개신교가 강조한 성서 전통에서 개신교의 독특하고 깊은, 그리고 강력한 영성이 형성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개신교의 영성 문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더욱이 한국 개신교 현실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개신교는 너무 초기 기독교의 영성의 장점들을 가톨릭에게만 넘겨준 것이 아니겠나 그렇다.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에
뭔가 앞에 형용사를 붙인다. 개신교 영성, 기독교 영성, 가톨릭 영성 이렇게 말이다. 영성은 Spirituality를 표현을 했는데, 영성을 어떤 형성되어 있는 어떤 능력, 자질로 생각한다. 예수의 영성은 영이 살아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역동적이고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과정이고, 끊임없이 변화를 통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단계를 성취해서 졸업하는 것이 아니다. 일(노동) 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만나고, 또 밥 먹고, 일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가 모두 하나의 삶이다. 이것이 영성 수련이다. 예수가 그렇게 하셨다.

그런 맥락에서 영성이라 함은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 그리고 타종교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타종교간의 대화, 만남이 의미가 있겠다. 종교간 대화의 궁극적 지향점과 목표는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 화해, 갈등, 싸움을 미리 방지하고, 평화를 이루는 데 가장 필수적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보편적이고 중요한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지향점은 진리 탐구를 위한 중요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웃 종교, 특히 힌두교를 많이 들여다보면서 개신교 신학, 교리가 얼마나 좁은지를 절감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전제를 지니고 있다. 신학적 전제, 교리적 전제, 교회 문화적 전제
등등. 이 틀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와 예수를 바라보는 눈이 좁아지거나 사시가 되었다. 그래서 이 틀에서 벗어나기란 엄청난 도전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렵다. 종교간 대화는 잘못된 틀을 무너트리고 더 넓은 진리의 틀로 인도하는 도구다. 그러니 영성 없이 종교간 대화는 불가능하며 또 영성 없는 종교간 대화는 사치다.

좋은 지적이다. <오늘>도 기독교의 아름다운 가치와 문화를 서로 소통하게 하는 일에 비기독교인들 속에 있는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내는 일을 잡지라는 매체를 통해 하고 있다. 중요한 지점에서 비슷하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기독교가 처한 소통불가능은 생각해봐야 하겠다. 평화로움을 추구하며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 여기저기서 소통이라는 말이 끊이지 않게 들려 온다. 그런데 소통이 안 된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소통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 정말 서로가 소통 안 되는 현상에서 의미의 불통을 말한다. 또 하나의 측면은 아예 소통이라는 작업 자체를 하지 않고 단절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불가능을 말할 때 전자의 의미가 더 크다. 그렇게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소통도 하기 전에 ‘저 사람, 저 단체, 저 기관하고는 소통이 안 된다’는 전제가 크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보인다. 이런 전제가 편견이 되면 급기야는 소통할 수 있는 사람하고만 소통하는 것이다. 오히려 불통의 또 다른 전제라고 볼 수 있다.
교회문화는 어떤가? 가장 소통이 안 되는 곳 중에 교회가 아닌가? 교회도
당회를 비롯해 각종 신도회의, 교육회의는 많은데 성도간 교제로서 소통의 문화는 사라진 듯하다. 교회 내 세대간 대화의 단절은 심각하다. 목사와 장로, 장로와 평신도 사이의 소통도 평균 이하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영적으로 접근해보면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이 소통 안 되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예수와 소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회에서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그러기에 현재 기독교 내에도 소통을 주장하지만 그들이 정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만의 소통이 문제가 아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즉 나와 하나님의 소통하는 문화가 회복된다면 아마 교회 내 소통문화도 훨씬 발전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먼저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한다.

자유로움과 다양함이란 것이 적당한 그릇과 마음에 담긴다면 거기에서 나오는 진리의 힘은 강력할 것이다. 김진 목사
를 만나며 그는 적당한 그릇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영적 수도자로서 예수를 따르는 그의 영성이 더 넓어지고, 그 넓이 만큼 더 깊어지길 바란다.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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