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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문화동네 사람들

탤런트 왕희지 ㅣ 동행, 내 삶의 다른 이름

에디터 신정은|사진 탁영한


얼굴과 인상의 경계는 어디일까. 두 단어를 나누는 기준점은 ‘시간’ 이라고 나름대로의 답을 내린 적이 있었다. 얼굴에 시간이 담겨 ‘인상’ 이라는 기운을 내포할 때까지. 우리의 삶이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신 예쁜 얼굴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인상으로 바꾸는 과정인지 모른다. 최근 드라마 <아현동 마님>의 주연으로 한창 바쁜 활동 중인 탤런트 왕희지는 예쁜 얼굴에 좋은 인상까지 겸비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여자에서 마님으로 그 과정을 살아내서일까. 첫인상의 포근함이 오래도록 남은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가슴 가득 ‘좋다’라는 수식어를 품는다.


욕심 없이 주어진 일

드라마 <아현동 마님>은 시작부터 주목을 받았다. 얼굴은 알려져 있되 주연으로의 활약을 보인 적 없는 배우들을 기용해 작품을 쓰는 ‘임성한 작가’ 라는 딱지가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드라마 시작 당시, 제작발표회를 생략해 외려 집중을 더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인어아가씨>와 비교하며 ‘제2의 장서희’ 라는 예측이 감돌 때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축하 인사도 생략한 에디터의 당돌한 질문에 외려 웃음을 짓는다.

“저는 주연, 욕심 부린 적 없어요. 주연으로 캐스팅 된 건지도 모르고 시작한 걸요. 마냥 기쁘고 좋았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웠죠. 부담감이 컸어요.”

<아현동 마님>을 시작하기 전, 가족끼리 맘 편히 여행을 갔다 왔단다. 그저 다시 일을 한다는 심정으로 나갔더니 알고 보니, 주연이었다. 그동안 오랜 연기 생활 끝에 그저 나하고 잘 맞는 역할,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을 성의껏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욕심 없는 삶의 자세가 모이고 모이다 보니, 외려 그 점을 높이 산 제작진들이 저절로 그녀를 찾았다. 작년 말 신인상을 수상한 상대 배우 김민성의 시상식장에 동행한 것도 욕심 없는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연장선상이다. 오랜 세월 조연으로 지낸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상대 배우가 상을 받는다는 데 혼자 보낼 순 없었다고. 슬쩍 그래도 상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물으니, 솔직한 답변이 돌아온다. “올해는 받아야죠.” 주어진 일을 마땅히 해내고 기대하며 가는 일, 비우면 채워진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쉼 속에서 발견한 내 길

사실 그녀는 93년 MBC 공채탤런트로 데뷔한, 경력이 벌써 15년째 접어드는 배우다. <백야 3.98> <찬란한 여명> <파도> <폭풍의 계절> 등 굵직한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활동을 해왔다. 그러던 중, 91년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장 일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서운 법. 시간이 더할수록 건강이 나빠져 잠시 일을 쉬었다. 몸이 아파 쉬면서도 직업병인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저기 저 부분에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온 힘을 다했죠. 하나님께서 저보고 이 일을 계속 하시라는 건지, 쉬면서 고민도 했구요. 시청자들에게는 점점 잊혀지더군요. 그러다 이게 정말 내 일이라면 다시 했음 좋겠다 생각할 때쯤, <굳세어라 금순아>가 연결됐어요.”

연기라는 건 타인의 옷을 입는 것과 동시에 자신은 그대로 발가벗겨지는 일일테다. 그 간극을 살아내는 일이 힘겨워, 쉬어야 할 때 푹 쉬어야 하는 직업이지만 그때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해 밀려드는 고민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더구나 그녀처럼 몸이 아파 어쩔 수 없이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됐을 땐, 그저 맘 편히 쉰다는 건 거짓말일 게다. 그런 고민과 쉼 속에서 나오게 해 준 작품이 <굳세어라 금순아>다. 굳세게 살아가는 주인공을 위해 물심양면 힘을 써주는 배역으로 그녀의 단아하고 착해 보이는 외모가 캐릭터와 잘 맞아 시청자들에게 잊혀졌던 그녀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킬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때 이후로 일이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저 삶의 일부로 보이더군요. 마음을 비우고 일을 했더니 반응도 좋았구요. 그 부담을 즐기면서, 참 감사했어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굽이굽이 발견한 은혜

집안이 모두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던 덕분에 모태신앙으로 성장한 그녀는 지금 소망교회를 출석하고 있다. 어느 덧 7년째라고. 요즘 같아선 일일 드라마 촬영 스케줄에 치어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복잡다난한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비교적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순간순간마다 은혜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일 잘되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에 5~6년을 달려왔더니, 사고를 당해 고스란히 그만큼의 시간을 쉬게 하시더라며, 다 털어내고 비워낸 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번진다. 그도 그럴 것이 <굳세어라 금순아> 이후 다시 2년여 시간이 흐르고 <아현동 마님>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굽이굽이 은혜를 발견한다. 절로 기도가 나오길,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닌 일이라면 그냥 잘 안 풀리게 해달라고 맡겨버렸단다. 꽁꽁 숨겨 두고 기다리게 하신 뜻을 발견하니 그저 ‘동행’하심에 감사하다는 고백만 나온다.

“저는 그래요. 제게 있어 연기란, 신앙이란, 그저 삶의 일부분일 뿐이에요. 음, 하나님이 내 손을 잡고 자그마한 오솔길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도 걸어갈 수 있는 그런 느낌, 그게 저에겐 신앙이에요.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인터뷰를 했더라면 아마 연기도 ‘모든 것’ 이라고 말했겠죠. 지금은 아니에요.”


즐기는 삶에 대한 본질을 알기에, 심지어 연기자라는 직업도 취미 생활보다 좀 더 노력을 기울여 즐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 따스한 인상이 주는 여유로움의 비법 또한 거창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녀는 얼마 전 과로로 입원을 했을 정도로, 일일드라마 주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덕분에 ‘어라, 오늘이 주일이야.’ 하며 정신없이 지내는 요즘이지만 적어도 마음의 여유쯤은 잘 지키려고 애쓴다. 드라마가 끝나면 엄마와 여행을 떠날 거라며 시원한 웃음을 짓는데, 그 입 끝에서 그녀에게 녹은 신앙과 삶의 자세가 은은하게 번진다. 예쁜 얼굴에 좋은 인상까지 간직한 그녀, 왕희지. 그 옆에 침묵을 나눌 수 있는 동행자가 있는 한, 그녀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길은 오솔길처럼 평화로울 거란 막연한 기대가 움튼다. 아현동 마님,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