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리, 그녀는 아직도 신인이다. 설익은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연기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다. 데뷔 10년차를 바라보는 터라 카메라의 시선도 담담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유독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나눌 때의 눈맞춤에는 여전히 수줍음이 가득하다.
성게, 가시가 잘리다
KBS의 새 주말드라마 촬영준비로 분주하다 했지만 “그래도 <오늘>과 만나겠다”는 약속이 이어져 다행이었다. 알고보니 ‘복음과 문화’에 봉사하고 헌신하겠다는 그녀의 다짐을 꼭 지키려 하기 때문이라고 매니저가 귀띔을 한다. “(이)유리가 개인적으로 꼭 부탁한 게 하나 있어요. ‘앞으로도 이런 일로 자기를 부르는 곳에는 빠지고 싶지 않다’고.”
예쁜데 착하기까지 한 사람을 보면 대부분 “신은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이유리를 두고서도 누군가 또 어디에서 하나님이 창조물들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불만을 품을 만하다. 실제로 보니 그녀는 정말 예뻤고, 인터뷰와 촬영 내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달라진’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천이 되기 전 그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건너편에 있던 매니저를 가리키며) 오빠가 산 증인이에요. 처음 데뷔한 이후로 지금까지 함께 해오고 있는데, 저를 보면서 정말 변했다는 얘기를 자주 해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음, 뭐라고 할까. 그분을 만나기 전, 저는 밤송이처럼 온몸에 가시가 돋은 ‘성게’였어요. 사람을 먼저 찌르지는 않았지만, 서로에게 가깝게 다가서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도 못했고,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주님을 만나게 된 다음, 그분께서 제 몸의 가시를 모두 다 잘라주셨어요.”
인생의 가드레일
오래전, 어린 나이에 그녀는 이미 애어른이 다 돼있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의 진리란?’ 얘기를 듣다보니 그 시기에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던 문제들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전 원래 어렸을 적부터 ‘진리’라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굶주려 있었어요. 가까운 미래 혹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들어가야 할 사춘기적 몽상과 공상 안에 제가 풀 수 없던 철학적인 주제들을 온통 채워 넣고 혼자 헤맸어요. 청소년기에도 그런 주제를 던져놓고 혼자 고민하는 시기가 있긴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수위를 넘어서 있었어요.” 동기들이 흔히 겪는 진로와 성적, 이성문제와는 사뭇 다른 뜻밖의 방황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입시를 앞두고 철학과 진학을 놓고 갈등하거나 종교와 인문학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다.
네이버 인물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해봤다. ‘종교 : 불교’ 좀 이상하다. “사실 불교에 심취해있기도 했어요. 삶에 대한 공허감이나 의문은 자꾸 커져만 가는데 답을 알려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더라고요. 천수경을 읽으면서 정득각(正等覺 :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모든 사물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를 얻음을 일컫는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적 목마름은 해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가족들 역시 모두 불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었다.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기가 다른 가정보다 어려울 법도 하지만 그녀에게 믿음의 시기는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어느 날 친구가 들려주는 교회얘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평소에 나누는 수다처럼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목사님이 예배시간에 어떤 설교를 했는지,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결정적 계기도, 타인의 집요한 전도와 권유도 없이 그녀는 먼저 친구에게 교회에 가겠다고 말했다. “예배당에 앉아 성경책을 펼쳤더니 주기도문이 나왔어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대목을 보는 순간, 눈앞에 온통 그 대목들이 가득 찼어요. 이제는 그분을 믿고, 그분께 의지하고 싶다는 결심을 했어요.”
벼락처럼 쏟아진 순간의 믿음이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위태롭던 적은 없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이 결코 강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일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어요. 예전에는 제가 보고 느낀 만큼,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방식이 자유롭게 느껴지면서도 늘 고민을 안고 살았거든요. 하지만 뭐랄까요. 이제는 앞에 반듯한 길이 놓여있고, 양 옆으로는 밖으로 일탈하지 않도록 가드레일이 막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유아기적 환상에 빠져 있는 연인을 위한 진정한 사랑은 그 앞에 현실을 들이대며 그 환상을 무참히 깨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손 내미는 것처럼, 그녀에게 신앙은 자신의 결핍을 굳이 지적해서 상처주지 않고 그 안을 스스로 조용히 채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란다.
잔이 넘쳐 흐르듯
얼마 전 결혼한 탤런트 서민정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해준 은인이 이유리’라고 밝혔다. 크리스천으로 거듭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그녀가 타인의 신앙을 인도해주고 있었다. “이유리 씨, 그럼 전도는 몇 명이나, 어떻게 했어요?” 궁금하면 물어보는 게 당연하지만, 아예 대놓고 던진 질문이 제대로 우문이다. 바로 현답이 이어졌다. “잔이 넘쳐흐르다 보니 전도라는 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180도 달라진 제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게 되면 신앙의 얘기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자신도 믿음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재작년에 세례를 받았고, 기독교를 대놓고 반대하시던 아버지와 언니도 이제는 함께 가정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 믿음이 성숙해졌어요.”
사역을 위해 자신의 달란트를 아낌없이 바치겠다던 이유리. 방송활동과 문화사역 사이에 갈등은 없을까. 그녀는 기독교 매체에 나와 간증을 하고, 크리스천 공연에 출연하며, 자원봉사에만 매달리는 게 문화사역의 전부가 아니란다. “일단 크리스천 연예인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할 거 같아요. 제가 연기활동을 성실해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문화사역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인 듯해요. ‘저런 사람도 하나님을 믿었나?’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면 교회 문 앞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KBS의 새 주말연속극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난여름 사극 영화를 준비하다가 무리한 스케줄로 인한 건강문제로 촬영에서 도중하차한 이후,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당시에는 아까운 작품을 놓쳐 아쉬움이 클 수 있었을 법한데, 그녀는 오히려 그 일로 새롭게 충전할 수 있는 휴식을 얻어 괜찮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좋은 작품(드라마)으로 찾아갈 수 있게 해주셨잖아요.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돌아보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려요.” 낙관과 긍정이 배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그녀가 성숙하다는 느낌이다.
유리, 다윗을 사랑하다
인터뷰 말미에 뜬금없이 “인터뷰기사 제목 하나만 지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듯 몇 개를 연이어 내놓는다. “‘하나님 은혜에 민감하자’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들이 다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인데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유리, 다윗을 사랑하다’는 어떨까요. 성경 속의 인물 중에서 저는 다윗을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요. 여러 가지 더 있어요. 음, 그리고 또…” 제목이 많아지면 편집이 어려울 것 같다는 농담까지 잊지 않는다.
“믿음생활을 하다 보니 정말 어려운 것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과연 예전 그녀에게 가시가 있었을까. 지금 그 가시가 잘린 자리에 어느덧 은혜의 열매가 맺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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