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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문화동네 사람들

개그우먼 김미화 ㅣ 뿌리 깊은 나무가 잘 자라듯

에디터 태원석 

 

살아있다는 것은 자란다는 것을 뜻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또 내일은 오늘과 다르게 성장한다. 진정 살아있는 사람은 자란다. 키가 자라고, 머리가 자라고, 마음이 자라고, 영혼이 자란다. 웃음을 주었던 일자눈썹 순악질 여사에서 깊고도 넓은 영향력을 끼치는 이름, 김미화가 되기까지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온 사람. 존재의 무게감이 달라진 그녀는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성장하는 한 그루의 나무 같다. 이제는 ‘개그우먼’이라는 수식어 하나로는 너무 부족한 작은 몸집의 그녀, 거대한 에너지를 겸손하게도 뿜어내는 방송인 김미화 씨를 만나 보았다. 


개그우먼이 시사 진행자가 되기까지

인터뷰어의 마음을 헤아리며 첫 대면을 편안하게 풀어가는 걸 보니 그녀는 역시 베테랑 인터뷰어다. 그녀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이 벌써 세 개가 아닌가.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SBS TV ‘김미화의 U’, OBS 경인TV ‘주철환ㆍ김미화의 문화전쟁’. 모두가 시사, 교양 프로그램이다. 그녀의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은 것은 어렵다고 인식되는 시사 문제를 바로 우리들의 눈높이에서 편안하게 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주부님들이 참 많이 듣는다고 하시더라구요. 전문가가 진행을 하면 어려운 용어가 나와도 넘어가지만, 저는 일단, 제가 모르기 때문에 그 뜻이 뭐냐고 솔직히 물어보니까 청취자들이 듣기에 시원하신가 봐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할 때, 그녀는 우리들의 눈과 귀의 주파수를 잘 맞춰주고 있는 셈이다.

“한창 개그를 할 때는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다녔죠.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다. 자신 안에 내재된 것을 키워가기 위해 공부가 필요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계속 성장하고 자라야 했어요. 돈으로부터의 집착에서 빠져나와 스스로를 돌아보며 노력 많이 했죠.” 지금의 그녀는 역시 그냥 된 게 아니었다.

“시사프로 진행을 개그맨이 한다는 PD의 발상이 얼마나 엉뚱해요? 그런데 그 발상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어요. 그것도 여성인데요. 흔히 ‘여성 MC는 꽃이다’ 말하지만 보통 보조 진행이잖아요. 저는 보조진행이라도 할 만큼 예쁘지도 않은데(웃음). 세상이 변했다는 거예요. 여성도 노력하면 깰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여요.” 루쉰의 말처럼 길이 아닌 곳도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듯 그녀가 버티는 만큼, 새로운 길을 만드는 만큼 후배들의 영역도 넓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선택과 걸음이 더욱 소중하다.


꿈? 재밌는 할머니! 

이쯤이면 여느 대기자를 능가하는데도, 자신은 그냥 개그우먼이란다. “늙어서도 무대 위에서 웃기고 싶어요. 한국에서 이 소망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해서 개척자가 되었으면 해요.” 조심스레 내놓는 말이지만 힘이 있다. 시대에 따라 위치가 바뀌어도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재밌는 할머니’로 늙고 싶다는 그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소신을 또릿하게 말한다.

“어떤 프로그램을 어떤 형식으로 하든, 그 속에는 ‘인간’이 있어야 해요. 그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죠.” 사람을 면박하고, 위축되게 만드는 코미디는 사절이란다. 사람을 살리고 세워주는 유머가 진정한 웃음을 만드는 것 아니냐고. 사람을 깎아 내리는 것이 일상적인 유머가 되어 버린 요즘, ‘인간’이 빠진 웃지 못 할 코미디가 얼마나 많은가. 그녀의 방송을 보고 들으면, 행복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나 보다.


가족, 그녀의 힘

알려진 대로 그녀는 최근에 새롭게 가정을 꾸렸다. 호주제가 폐지된 이후 자녀들의 성을 바꿔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혼 후, 싱글맘으로 살아가던 그녀가 새로운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따뜻한 격려와 축복을 많이 받았던 이유는 아픔과 절망의 길을 걸으면서도 삶에 대한 애정과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던 그녀였기 때문 아닐까. 그렇게 맺어진 ‘가족’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힘이자, 삶의 원천이다.

“되도록이면 주말은 가족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데, 요즘처럼 날씨가 좋으면 봉사단체 행사가 많아서 그것도 힘들어요. 모든 식구들이 저에게 맞추다 보니 참 미안하죠. 동생의 결혼도, 남편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것도 제 녹화가 없는 날로 하다 보니….” 스스로 ‘슈퍼우먼’이 아님을 자인하는 그녀, 가족들의 지지와 후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고맙고 감사한 만큼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역경을 딛고 일어 선 그녀의 삶이 우리네 마음에 용기를 주고 희망이 될수록, 아픔도 기쁨도 함께 나눌 몫이다.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뿐

어릴 적, 미아리 산동네에 있던 작은 교회에 크림빵을 먹으러 다녔다. 그렇게 다니던 교회가 어느 순간 삶의 굽이굽이마다 방향을 잡아주고 따스하게 안아 주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다. 한부모가족이 되어 힘들었을 때는 교회 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목사님과 여러 교우들의 기도는 큰 힘이 되었다.

“사회는 편견이라는 게 있잖아요. 교회 가는 것도 두려울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더 적극적으로 목사님을 찾아가서 기도 받고 했어요. 힘들 때 장로님, 집사님들께서 기도해 주시니까 든든함도 생기고…. 교회가 죄의식과 사회적 시선에 힘들어 하는 이들을 좀 더 넓은 품으로 맞아 주면 세상도 더 많이 좋아지지 않겠어요!”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위축되기 보다는 오히려 신앙으로 당당하게 극복하려 했던 그녀의 용기와 믿음이, 요즘 그리 넓지 못한 교회의 품을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매순간 느끼며 살아간다는 그녀에게 봉사활동은 그녀가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이요, 격려다.  “억지로 하기 힘들지 않느냐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억지로 하지 않아요. 마음이 움직일 때,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있을 때 가죠. 제가 가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잖아요.” 바쁜 일정에도 양로원, 고아원, 여성단체, 근육병 환자들을 후원하는 행사들에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간다. “종교의 벽을 넘어 스님들의 ‘빈 그릇 운동’도 도왔어요. 수녀님들이 부탁할 때도 가고요.” 어떤 날은 하루에 목사님, 스님, 수녀님에게 다 연락 오는 날도 있다고!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달란트인데, 자만하지 않고 받은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양로원 같은 곳에 위문을 가면 제가 더 많은 축복을 받아요. 그 분들이 아침마다 기도하시면서 ‘김미화’를 위해서는 특별히 ‘통성기도’를 해 주시니까 제가 더 감사해요.”


‘웃기고 자빠졌네’

그녀가 자신의 묘비에 남기고 싶다는 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진실하게 고민하며 꿈꾸는 그녀는 세상의 편견어린 시선을 교정하고, 밝은 웃음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열매를 하나씩 맺어간다. 지금도 그녀의 마음과 영혼은 계속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