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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문화동네 사람들

팝 아티스트 낸시 랭 ㅣ 비키니 입은 잔치는 이제 시작이다


에디
태원석

‘꿈과 갈등’을 주제로 했던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개막식 날, 산마르코 광장에는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이란 주제로 빨간색 란제리에 하이힐을 신고 바이올린을 연주한 이가 있었다. 이 특이한 퍼포먼스로 단번에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행위 예술가, 바로 낸시 랭이다. 퇴색된 꿈을 이루어 준다는 대표작 ‘터부 요기니 시리즈(Taboo Yogini Series)’와 이색적인 퍼포먼스로 주목을 받으며 ‘걸어 다니는 팝아트’라 불러지는 낸시 랭. 아티스트인 동시에 아트 디렉터, 방송진행자, 광고모델 등 다양한 활동으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녀를 ‘오늘’ 만났다.


‘애교의 여왕’이라는 별명은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타났지만, 깜찍한 표정과 싹싹한 말로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이내 그녀에게 기울었다. “늦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 대신 오면서 어떤 포즈가 좋을지 생각하면서 왔어요. 이러면 되나!(웃음)” 카메라 앞에 선 그녀는 미리 정해 놓은 듯 포즈도 척척이다. 촬영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녀에 대한 선입관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삶의 그늘, 긍정의 웃음으로 

그녀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늘 평행선이다. 소비주의의 변종으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터부’를 깨는 기분 좋은 파격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에 대한 이런 반응들이 고민될 법도 한데 정작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아티스트로서 영광이죠. 감사한 일이에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역사 속에서 논란이 됐던 아티스트들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았고요. 어쨌든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은 저마다 보는 게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는 달리 그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유복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어머니는 사업 실패에 이어 17년째 암으로 투병 중이고, 아버지마저 2005년에 하늘 품에 안기셨다. 그녀는 갑자기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다. 현실이 힘들다보니 남의 시선은 저만치 있을 수밖에. “삶이, 현실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에는 상처가 없어요. 오히려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의 쾌활함은 아마도 이런 긍정의 힘에서 나오나보다.



‘고유한 나’의 영화 같은 삶

“저는 삶을 35년의 필름으로 봐요. 20살부터 55세까지. 35년이면 꿈을 위해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물론 그 후에도 작품 활동은 계속 하겠지만… 제 삶이 35mm 영화라면 저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빌려보는 영화가 되고 싶어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에 각자의 그것을 최대한 끌어 올려서 살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천국이 되지 않을까요?”저마다 고유한 모습으로 만드신 그 분의 뜻을 따라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 그 천국을 누리는 삶일 것이다. “근데 우리는 뭐든지 획일적으로 똑같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뭐가 좀 다르거나 튀면 마치 두더지 잡는 게임을 하듯, 튀는 사람을 집어넣어 평균화 시키려 해요.” 

사실, 매우 ‘그녀다운’ 대표작 ‘터부 요기니 시리즈’도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 선악의 갈등 속에서 거룩함을 기다리시듯, 낸시 랭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금지된 능력의 ‘터부 요기니’를 앞세워 사람들의 선한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리스어 사전을 찾아보면 ‘요기니’는 데몬(Demon·사탄)이라고 나와 있어요. 터부 요기니는 신적 능력이 있지만 단지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영적 메신저에요. 제가 그렇게 롤(Roll)을 정하면서 그 스토리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암호화 시켜서 집어넣었죠.”




그녀에게 있어 그 분이란

그녀는 지난 해 10월부터 CTS TV ‘하와유(하나님&당신)’를 진행하고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은 UCC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녀의 평소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왜’ 진행하게 됐다고 물었더니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요. 아임 크리스천!”하고 너무도 명쾌하게 대답한다. 질문한 것이 머쓱해졌다. “하나님은 저한테 가장 든든한 백이거든요.” 쉽지 않은 삶이었지만 도무지 그늘이 보이지 않고 생기로 충만 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삶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 있었기 때문.

작품에서도 느껴지듯, 그녀는 이미 어릴 적부터 영적 예민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 날라리(!) 신자였고, 어머니는 사업 때문에 점집을 찾아다니며 집안 여기저기에 부적을 붙이는 분이었다. 근데 초등학교 때 예수님이 좋아서 그냥 혼자 교회를 찾아갔단다. “그 때는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에 갔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과 맨투맨으로 기도를 하고 싶은 거예요.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하는 게 제 마음에 좀 안 들었죠. 전해주시는 건 알겠는데, 직접 하면 안 될까?(웃음) 그 이유 하나로 기독교로 바꿨어요.” 역시 그녀다운 결정이다.

교회 생활에 대해 물었더니, 첫 수련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 신입생 때 처음으로 교회수련회에 참석했었어요. 은혜를 많이 받고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이러저러한 약속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지은 죄를 회개하며,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요.” 그런데 그런 극적인 경험도 잠시, 수련회에서 돌아와 맞이한 일상은 완전히 이질적인 현실이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 나니, 제가 너무 부끄럽고 죄송한 거예요. 지키지 못할 약속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그 담부터 수련회에 가지 않게 되었어요.” 스스로에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일을 즐기다

퍼포먼스에 비해 평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개인전과 기획전 준비로 쉴 틈 없이 바쁘다. 틈틈이 잘 쉬어야겠다는 말에 그녀는 ‘일이 곧 쉼’이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을 모두 쏟아 부어 작업하는 동안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또 다른 쉼의 방법은, 잠. “제겐 두 가지 세계가 있어요. 현실과 꿈.” 컬러풀하고, 리얼하고, 판타스틱한 꿈을 꿀 수 있어 잠자는 게 너무 즐겁단다. 작품의 모티브가 되고, 창조력을 샘솟게 한다는 그녀의 꿈 속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현대미술이 비키니를 입듯 가벼워져야 한다는 도발적인 언어는,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시인의 고백이 전했던 파격을 다시 한 번 주었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그 고유의 아우라를 상실하게 된다’고 했지만 열광하는 대중이 있는 한 아우라의 변종을 막을 수 있을까!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른이 된 그녀의 잔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듯한데.“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에 각자의 그것을 최대한 끌어 올려서 살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천국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