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없이 주어진 일
드라마 <아현동 마님>은 시작부터 주목을 받았다. 얼굴은 알려져 있되 주연으로의 활약을 보인 적 없는 배우들을 기용해 작품을 쓰는 ‘임성한 작가’ 라는 딱지가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드라마 시작 당시, 제작발표회를 생략해 외려 집중을 더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인어아가씨>와 비교하며 ‘제2의 장서희’ 라는 예측이 감돌 때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축하 인사도 생략한 에디터의 당돌한 질문에 외려 웃음을 짓는다.
“저는 주연, 욕심 부린 적 없어요. 주연으로 캐스팅 된 건지도 모르고 시작한 걸요. 마냥 기쁘고 좋았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웠죠. 부담감이 컸어요.”
<아현동 마님>을 시작하기 전, 가족끼리 맘 편히 여행을 갔다 왔단다. 그저 다시 일을 한다는 심정으로 나갔더니 알고 보니, 주연이었다. 그동안 오랜 연기 생활 끝에 그저 나하고 잘 맞는 역할,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을 성의껏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욕심 없는 삶의 자세가 모이고 모이다 보니, 외려 그 점을 높이 산 제작진들이 저절로 그녀를 찾았다. 작년 말 신인상을 수상한 상대 배우 김민성의 시상식장에 동행한 것도 욕심 없는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연장선상이다. 오랜 세월 조연으로 지낸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상대 배우가 상을 받는다는 데 혼자 보낼 순 없었다고. 슬쩍 그래도 상에 대한 욕심은 없는지 물으니, 솔직한 답변이 돌아온다. “올해는 받아야죠.” 주어진 일을 마땅히 해내고 기대하며 가는 일, 비우면 채워진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쉼 속에서 발견한 내 길
사실 그녀는 93년 MBC 공채탤런트로 데뷔한, 경력이 벌써 15년째 접어드는 배우다. <백야 3.98> <찬란한 여명> <파도> <폭풍의 계절> 등 굵직한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활동을 해왔다. 그러던 중, 91년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장 일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서운 법. 시간이 더할수록 건강이 나빠져 잠시 일을 쉬었다. 몸이 아파 쉬면서도 직업병인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저기 저 부분에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온 힘을 다했죠. 하나님께서 저보고 이 일을 계속 하시라는 건지, 쉬면서 고민도 했구요. 시청자들에게는 점점 잊혀지더군요. 그러다 이게 정말 내 일이라면 다시 했음 좋겠다 생각할 때쯤, <굳세어라 금순아>가 연결됐어요.”
연기라는 건 타인의 옷을 입는 것과 동시에 자신은 그대로 발가벗겨지는 일일테다. 그 간극을 살아내는 일이 힘겨워, 쉬어야 할 때 푹 쉬어야 하는 직업이지만 그때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해 밀려드는 고민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더구나 그녀처럼 몸이 아파 어쩔 수 없이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됐을 땐, 그저 맘 편히 쉰다는 건 거짓말일 게다. 그런 고민과 쉼 속에서 나오게 해 준 작품이 <굳세어라 금순아>다. 굳세게 살아가는 주인공을 위해 물심양면 힘을 써주는 배역으로 그녀의 단아하고 착해 보이는 외모가 캐릭터와 잘 맞아 시청자들에게 잊혀졌던 그녀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킬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때 이후로 일이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저 삶의 일부로 보이더군요. 마음을 비우고 일을 했더니 반응도 좋았구요. 그 부담을 즐기면서, 참 감사했어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집안이 모두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던 덕분에 모태신앙으로 성장한 그녀는 지금 소망교회를 출석하고 있다. 어느 덧 7년째라고. 요즘 같아선 일일 드라마 촬영 스케줄에 치어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복잡다난한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비교적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순간순간마다 은혜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일 잘되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에 5~6년을 달려왔더니, 사고를 당해 고스란히 그만큼의 시간을 쉬게 하시더라며, 다 털어내고 비워낸 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번진다. 그도 그럴 것이 <굳세어라 금순아> 이후 다시 2년여 시간이 흐르고 <아현동 마님>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굽이굽이 은혜를 발견한다. 절로 기도가 나오길,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닌 일이라면 그냥 잘 안 풀리게 해달라고 맡겨버렸단다. 꽁꽁 숨겨 두고 기다리게 하신 뜻을 발견하니 그저 ‘동행’하심에 감사하다는 고백만 나온다.
“저는 그래요. 제게 있어 연기란, 신앙이란, 그저 삶의 일부분일 뿐이에요. 음, 하나님이 내 손을 잡고 자그마한 오솔길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도 걸어갈 수 있는 그런 느낌, 그게 저에겐 신앙이에요.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인터뷰를 했더라면 아마 연기도 ‘모든 것’ 이라고 말했겠죠. 지금은 아니에요.”
즐기는 삶에 대한 본질을 알기에, 심지어 연기자라는 직업도 취미 생활보다 좀 더 노력을 기울여 즐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 따스한 인상이 주는 여유로움의 비법 또한 거창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녀는 얼마 전 과로로 입원을 했을 정도로, 일일드라마 주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덕분에 ‘어라, 오늘이 주일이야.’ 하며 정신없이 지내는 요즘이지만 적어도 마음의 여유쯤은 잘 지키려고 애쓴다. 드라마가 끝나면 엄마와 여행을 떠날 거라며 시원한 웃음을 짓는데, 그 입 끝에서 그녀에게 녹은 신앙과 삶의 자세가 은은하게 번진다. 예쁜 얼굴에 좋은 인상까지 간직한 그녀, 왕희지. 그 옆에 침묵을 나눌 수 있는 동행자가 있는 한, 그녀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길은 오솔길처럼 평화로울 거란 막연한 기대가 움튼다. 아현동 마님,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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