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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영화 <포화 속으로> 읽기

두 개의 시선에 대한 성찰
감독|이재한
주연|차승원, 권상우, T.O.P, 김승우
2010, 12세

세상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염두에 둔다 해도, 세상에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제는 정체성의 상실 내지는 혼돈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삶이 많다는 말이다. 그것이 소수라면 모르겠지만 다수가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게 살아간다. 의도적인 이중행위라고 보진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과 비교해볼 때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교회 밖의 삶에서 그 차이를 쉽게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의문은 더욱 깊이 파고든다. 과연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일까? 세상에 묻혀가며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은 비단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안고 사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분명하게 의식하고 사는 사람과 잊고 살거나 혹은 굳이 의식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사는 사람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크 엘률과 올리버 버클리가 각각 쓴 책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읽어볼 일이다. 그렇지 않고 좀 간편한 방법을 찾는다면 전쟁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포화 속으로>를 감상할 것을 권하고 싶다.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양극단의 평가
영화를 선택해서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멀리 있는 일들을 문자적인 서술보다는 더욱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건 속 중심인물로, 때로는 구경꾼으로, 때로는 비평가로 영화 속에 참여하다보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내 삶의 일부를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영화일수록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더욱 강하다. 깊은 감동과 함께 시작과 끝이 너무 가깝다고 느끼면서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비단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포화 속으로>는 그러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를 보는 시각들과 평가하는 관점들은 다양할 수밖에 없지만, 이재한 감독의 <포화 속으로>에 대한 평은 일찍부터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한 쪽에는 비평가들이 붙여준 ‘반공영화’라는 딱지가 붙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북한군 박무랑(차승현)이 이끄는 766 유격대를 상대로 싸워야 했던 71명의 학도병들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보는 ‘감동적인 영화’라는 네티즌들의 평가가 있다. 상반된 평가를 낳게 한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전쟁영화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된다. 한편에서는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가진 영화가 통일세대를 위한 메시지를 담기를 원했다면, 다른 한편에는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전쟁의 참상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양자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일본해로 표기한 실수를 지적하는 것과 60년 전에 일어난 전쟁을 오늘의 시간에 재현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무엇에 중점을 두었는지, 어떤 사건을 영화로 표현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낙동강 전선
영화는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한국전쟁에서 낙동강 전선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 저지선과 최후의 공략선이라는 양측의 극단적인 상황판단으로 인해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다부동 전투이다. 양측 모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든 전투에서 2300명의 국군과 5690명의 북한군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고 한다. 전후 한 달이 막 지난 즈음에 당시의 처참했던 다부동 전투지를 방문한 조지훈은 다음과 같은 시로 진혼곡을 불렀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籠城)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이 황폐한 풍경이/무엇때문의 희생인가를 ……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이 없고/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던/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아군이 최후의 저지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전력을 낙동강에 투입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박무랑이 이끄는 부대는 당의 명령을 어기고 낙동강이 아닌 포항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진로를 예상하지 못한 국군은 71명의 학도병들만 남긴 채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하게 된다. 포항여중에 남은 학도병들은 훈련도 받지 않은 채 포항을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한 번의 전투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을 뿐인 중대장 학생의 지휘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지만, 학도병들은 최선을 다해 싸워 결국 11시간의 시간동안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71명의 학도병들이 그야말로 맨몸으로 사수해야 했던 포항여중전투의 의미는 낙동강 전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낙동강 전선의 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71명 학도병들의 이야기

<포화 속으로>에 담겨진 이재한 감독의 의도는 분명하다. 71명 학도병들의 실상과 그들이 치렀던 전투를 재현하는 일이다. 보는 자로 하여금 역사적인 사건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감동을 주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군인이 아닌 어린 학도병들이 치른 전투라는 점에서 영화는 더욱 가슴 아프고 또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71명의 훈련받지 않은 학도병들이 북한군 정규군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공격을 11시간 동안 저지했다는 사실을 접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가장 처음 드는 질문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은 이재한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졌을 것이라는 확신을 영화 속에서 거듭 확인해볼 수 있다. 71명의 학도병들은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도 못한 어린 학생들이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총알을 장전조차 할 수 없었던 중대장 학생이며, 교도소에 가는 대신에 북한군과 싸우겠다고 덤비는 모습은 그야말로 오합지졸들이었다. 군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훈련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나갈 체계도 없었다. 그들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방패막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학도병들에게서 놀라운 전투 능력이 발휘된 것, 아니 그들이 맡겨진 임무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학도병이 아닌 군인으로서의 정체의식 때문이었다. 감독은 특별히 이 부분을 크게 주목한 것 같다. 학도병만을 남기고 떠나는 강석대(김승우)대위와 포항으로 진격한 박무랑이 그들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대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강 대위가 던지고 떠난 “학도병은 군인인가, 아닌가.”는 한마디는 학생모두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전선에 투입된 이상 그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은 학생이 아니라 군인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화두였다. 내가 누구인가는 존재가 아닌 상황과 역할과 임무가 결정하는 것이다. “학도병도 군인”이라는 정체감을 확인한 학도병들은 당당한 대한민국 국군으로서 북한의 정규군과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박무랑에게 있어서 학도병은 “군인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일 뿐”이며 “어린아이인 데다,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이끌 재목들”이다. 그래서 박무랑은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고 백기를 내걸 때까지 2시간을 기다려 주는 여유를 보인다. 어떻게 보면 강대위보다는 박무랑의 시각이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박무랑의 시각은 진정성을 갖는 것이었을까? 강대위와 박무랑의 서로 다른 시각을 판단하는 기준은 학도병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듯 했다. 어차피 같은 민족에 속한 동포이기 때문이다. 전세에 따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분명하지 않았고 오직 복수와 복수만이 가득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승자가 곧 정의이고 그것이 역사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도병들은 군인으로서 정체성을 택했다. 그들이 그렇게 선택한 이유는 단지 대한민국국군에 의해 학도병으로, 아니 군인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북한군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 해도 그들은 그렇게 싸웠을 것이다. 죽어가면서도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부르는 어린 북한군의 외침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포화 속으로>는 승리로 이끌었던 포항여중전투의 핵심이 바로 학도병들에 대한 강대위의 인식, 아니 대한민국의 부름을 받은 자로서 학도병들의 정체의식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동 있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들의 먼 진심
그러나 이를 위해 감독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것으로 인해 평단의 혹평은 멈추지 않고 있다. 전쟁의 긴장감 속에서 학도병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또 혼란으로 가득한 상황이었음에 분명할 것인데, 전쟁 참여자들이 겪었음에 틀림없을 상황은 결코 재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그들이 훈련받지 않았고 어린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임무를 완수해야 했으며, 단순한 학도병이 아닌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북한의 정규군과 맞서 싸웠고 마침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일에 전념하고 있을 뿐이다. 비록 사실의 재현을 목적으로 한 영화라 해도 심리적인 측면에서 현실감이 너무 떨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참여자가 아닌 단순한 관객으로서 있어야만 했다. 71명의 학생들 모두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모두 공개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너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소개된 것은 아쉬움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부분이다. 영화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면, 자식을 내보내는 부모의 마음이나, 죽음이 예상되는 전투를 앞두고 부모를 떠올리는 자식의 마음뿐이었다.

전쟁을 통해 신화 혹은 영웅 만들기 전략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더욱 원하는 오늘 우리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독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 우리 시대는 전쟁영웅보다는 어떻게 하면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 굳이 영웅을 말하고 싶다면 평화의 영웅을 고민한다. 반공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오늘날의 전쟁영화는 영웅이 아닌 인간, 곧 휴머니즘을 다루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와 상황의 요청임에는 분명하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반공이데올로기가 다시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기에 전쟁영웅을 부각시키는 작업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끝으로 비록 전쟁영화라는 장르에서 기대되는 부분은 많이 약화되었다고 해도 감독의 의도와 메시지는 영화 속에 분명하게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강대위와 박무랑이 갖고 있는 학도병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은 한편으로는 소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혹이다. 기독교인으로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나마 영화가 그렇게 멀지 않게 여겨진 유일한 이유는 바로 학도병들의 정체의식 속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정체성 위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박해의 현장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지만, 세상에는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일들이, 상황들이 엄연하게 현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자크 엘률과 올리버 버클리가 말한 대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표현된다. 세상 안에서 살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사는 존재이다. 단순히 한 인간으로서 사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사는 것의 차이는 소명에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민 혹은 국민이며, 국민 혹은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다. 양자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 세상 가운데 이뤄지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고의 과제로 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제로는 작은 일 같아도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비록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또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확증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