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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권력 아래 안주하는 자는 모두 하녀다 (스포일러 있음)


영화 <하녀>를 보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오프닝 신에서 보여주는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무명의 한 여자의 자살사건, 큰 하녀 병식(윤여정 분)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는 은이(전도연 분)의 하녀로서의 삶, 그리고 엔딩 신에서 볼 수 있는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연출된 딸의 생일잔치이다. 모든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구성에 필자가 굳이 주목하는 이유는 영화가 다소 논리적인 구성과정을 거쳤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영화의 의미가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서로 분리된 듯이 보이는 세 부분을 하나의 구조로, 치밀하게 구성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오프닝 신을 본 관객은 강한 궁금증을 갖게 되는데, 그 후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사건의 단서에 대한 해결을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것인데, 감독은 사실 관객의 이런 예상을 계산에 넣고 있다고 여겨진다. 감독에게 있어서 오프닝 신과 그 후의 이야기는 비유적인 관점에서 구성된 것이며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엔딩신은 관객이 기대했던 것과 감독의 의도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준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의 첫 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어느 도시의 전형적인 밤거리 풍경이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난간에 기대어 한 여자가 서 있다. 로 앵글low angle을 통해 자신의 일들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누구도 자기 이외의 일 혹은 사람에 주목하지 않는 바로 그 때에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던 여자가 몸을 던진다. 은이는 비록 소란스런 현장을 보지 못하고 흔적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지만, 죽음의 흔적은 그녀에게 강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이것은 그녀의 결말을 예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복선으로 읽힐 수 있다. 첫 장면에서부터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리메이킹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도발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자살한 여자에 대한 은이의 호기심 가득한 관심과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굳이 그 흔적을 바라보는 은이의 모습으로 이뤄진 오프닝 신은 궁금증을 갖고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오프닝 신은 영화의 긴장감을 위해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관객은 그녀가 왜 자살하게 되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과 그 후로 이어지는 이야기와의 관계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줄거리를 이미 알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하나의 복선으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영화의 흐름만을 따라 간다면, 그 첫 장면은 영화의 복선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넘어, 이어지는 장면들이 그 이유에 대한 탐색작업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일종의 도입부로 여겨진다.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갖게 한다는 말이다. 은이의 하녀로서 삶은 죽음의 흔적을 엿본, 아니 어쩌면 떨어진 자리에 하얀 색 페인트로 표시되어 있는 사람의 형태가 자기 자신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하나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그리고 이어지는 병식(윤여정 분)의 등장 역시 원작에서 벗어나는 캐릭터다. 그래서 임상수의 <하녀>에서 병식의 역할과 의미는 영화 구성에 있어서 적지 않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병식에 의해 안내되어 들어가는 두 번째 공간은 오프닝 신에서 보여진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질적으로나 분위기에서 너무나 달라서 의미론적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미장센임을 알 수 있다. 첫 장면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은이는 지금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 벗어나 아주 특별한 공간으로 옮겨진 것이다. 유아교육과를 중퇴하고, 이혼한 은이로서는 식당에서 하는 허드렛 일이나 궁정같은 저택에서 하녀(실상은 딸의 양육에도 책임을 지는 위치)로서 사는 일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아니, 병식과의 대화에서 ‘나 이 짓 잘해요’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녀에게는 일종의 신분의 변화이고, 딸의 양육에 대해서도 약간의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존재로서 어느 정도는 자신의 기대가 충족되는 삶(유아교육과 출신이다!)이다.

은이가 들어가게 된 공간은 만삭의 아내와 딸과 더불어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삶을 살면서 막강한 재력으로 무장된 훈(이정재 분)의 집이다. 그는 피아노 연주와 적 포도주를 즐길 줄 알며,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것이 곧 자신이 높아지는 길임을 딸에게 가르칠 정도로 교양이 있어 보인다. 그로 하여금 교양 있는 사람으로 부각시키는 데에는 그가 아내 해라(서우 분)에게 대하는 태도나 하녀인 은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도 한 몫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담긴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던 것 같다.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큰 하녀 병식의 입에서 나오는 아(니꼽고)더(럽고)메(스껍고)치(사하다)!를 외치는 불만으로 가득한 표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역겹게 느끼는 것은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안’이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아들이 검사라는 권력의 한 주체로 상승되면서 병식은 점점 하녀로서 정체성과 삶에 회의를 갖게 된다. 훈이 집 밖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내는 물론이고 장모에게 있어서 훈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임에 분명하다.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는 만삭의 힘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해라는 그의 성적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심지어 넷째와 다섯째를 계획할 정도다. 남편 훈과의 삶, 아니 그의 밑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또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장모 역시 훈이 가진 권력과 그것을 함께 누리는 딸의 삶에 만족해하는 모습이다. 훈과의 관계는 장모와의 관계가 아닌 권력 있는 자와 그것에 만족하며 사는 딸을 가진 자와의 관계일 뿐이다. 훈과 은이의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시어머니가 그랬듯이 나중의 영광을 기대하며 꾹 참고 살아야 한다고 딸에게 훈계하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훈은 가장의 힘은 물론이고 자본의 힘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이다.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모습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있어서 돈은 곧 힘임을 나타낸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화려함이 현존하는 궁정 같은 집과 그 안에서 최고의 위치를 누리는 훈 자신은 최상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와의 관계에서 아내와 장모 역시 재력과 권력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고 또 그 아래에서 남편과 사위를 만족시켜 살아가는 또 하나의 하녀에 불과하다.

은이는 특별한 욕망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병식이 평가하는 바이기도 하지만, 훈의 딸이 즐겨 따를 정도로 은이는 순수한 영혼을 갖고 있으며, 보통 사람의 일상에서 벗어나 비록 권력이 제공하는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해도 별다른 욕심이 없이 훈의 집 안에 머무는 것을 단지 편하게 느끼고 또 그것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훈이를 받아들인 것은 힘에 압도된 것이며 그 힘 안에서 안주하며 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훈의 아내나 장모처럼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고, 병식에게서 볼 수 있는 자식을 위한 희생의 삶이라는 명분도 없다.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훈과의 불륜 관계에서 얻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그 아이를 빌미로 돈을 뜯어낼 것이라는 장모의 계산은 은이에게는 결코 정당하지 않다. 비록 권력에 안주하며 얻은 것이긴 해도 그녀에게는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가 유일한 희망이다.

돌발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장모가 꾸민 계획적인 사고에서도 유산이 이뤄지지 않자 훈의 아내는 유산을 촉발하는 약을 처방받고 그것을 은이가 먹는 보약에 섞어 넣는다. 결국 은이는 유산하게 되지만 모든 음모를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복수를 다짐한다. 그런데 복수라는 것이 조금은 생뚱맞다. 가족 모두가 편안하게 머무는 거실에서, 특히 훈의 딸이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살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의 수단이지만, 대체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최후의 보루이거나 혹은 자신의 잘못을 영원히 은폐하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로 죽는 것이 어떻게 복수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강한 의문을 남기는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엔딩 신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은 장면인데,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딸의 생일을 축하하고 딸이 전면에 나서면서 곁눈질을 하면서 끝나고 있다.

감독은 오프닝 신에서 보여주었던 한 여자의 자살과 복수로서의 은이의 자살, 그리고 마지막 딸의 생일잔치를 구조적으로 연출하면서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아니, 그는 무엇을 전하기 위해 관객들로 하여금 이런 장면들을 보도록 한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감독 스스로 말하고 있지만 오프닝 신부터 끝까지 영화를 보는 내내 참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나름대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던 중에 이장호 감독의 1983년 작품 <바보선언>에 이르게 되었다. <바보선언>은 절름발이와 창녀, 뚱보와 같은 사회의 그늘 속에 있는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파격적인 제스처를 통해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영화였다. 영화의 오프닝 신에서 속옷 차림으로 등장한 이장호 감독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는 후에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전두환 군부독재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고, 바로 이런 심정으로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고 판단해서 영화를 포기할 생각으로, 자살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찍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독은 비록 자살하는 심정으로, 곧 마지막 작품을 찍는다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장면을 보았던 사람들은 단지 감독 자신의 진솔한 마음만을 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당시 군부독재의 권력 아래 삶의 터를 마련하고 안주했던 사람들(직접적으로는 영화계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시대에 짓눌려 신음하는 민중들의 고통스런 절규를 듣고도 애써 외면해야만 했던 당시 지식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고뇌의 한 단면이었다.

한 여자의 자살로 영화를 시작하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권력이 제공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자와 어떤 관계에 있든지 결국 ‘하녀’일 수밖에 없다는 감독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하녀란 자기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개성의 상징인 일상적인 옷을 벗어 던지고 언제나 주인이 원하는 똑같은 옷만을 입어야 한다. 힘을 가진 자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으며, 그들이 나누어 주는 힘(돈)으로 또 다른 힘(아내와 장모)을 행사할 뿐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그 자신이 하녀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그 어떤 희망(임신)이라도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무참히 짓밟혀질 수밖에 없다(강제 유산).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큰 하녀 병식(윤여정 분)이 보여준 하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떠나겠다는 과감한 결단에서 볼 수 있듯이, 또 다른 권력(검사 아들)에 의탁하는 것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다른 길이 있다면, 은이가 보여주었듯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하녀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복수를 위해 선택된 행위가 자살로 표현된 것은 뜻밖의 연출로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지만, 임상수는 권력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해, 권력의 무의미함을 폭로하기 위해, 그리고 권력의 종말을 암시해주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만일 은이의 하녀로서 삶이 오프닝 신에서 일어난 죽음의 흔적을 보았던 그녀에게 일어난 에피소드요 트라우마였다면, 죽음의 순간과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딸에게는(생일잔치에서 표현된 딸의 트라우마) 어떤 불행한 미래가 전개될 것인가! 자신의 죽음을 보게 한 은이의 복수는 당대에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욱 끔찍한 복수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녀’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영 감독은 결코 ‘누가 하녀인가’를 화두로 던지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삶의 비극을 스릴러로 풀어냈을 뿐이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은 표면적으로는 리메이킹이라고 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김기영의 <하녀>에서 출연했던 배우(윤여정)가 큰 하녀로 바뀌고, 또 영화가 갖고 있는 몇 개의 이미지만을 빌려왔을 뿐, 전혀 새로운 각색이었다. 단지 시대의 변화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주제 자체가 바뀌었다. 임상수의 <하녀>는 ‘하녀는 누구인가?’, 아니 ‘우리 가운데 누가 하녀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권력에 길들여진 채, 권력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편안함에 만족하며 사는 모든 사람을 ‘하녀’로 규정하고 있다.

글. 최성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