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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매거진<오늘>/문화선교연구원

문제는 인간 경시 풍조: 사회적 사이코패스의 출현에 대한 경고

<아저씨>(이정범, 2010)와 <악마를 보았다>(김지운, 2010)

영화와 사회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당대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감상은 현실을 연상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이뤄진다. 예컨대 캐릭터들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거나 혹은 어떤 인물의 유형을 보는 일이다. 혹은 스토리를 통해서 현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 영화 감상을 통한 미적 경험은 증폭된다.

현실에 대한 연상이 직접적으로 이뤄지지 않아도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서 관객들의 현실 인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영화가 비현실적이라도 관객들의 반응 자체가 현실을 구성한다는 말이다. 관객과 영화의 이런 상호관계는 영화가 언제나 사회적인 의미 연관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필자는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만을 통해 단지 영화의 장면이나 스토리에 매이지 않고 우리 사회의 단면을 미루어 관찰할 수 있었으며, 이 글은 필자의 관찰과 그 결과를 기술해 본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2009)에 대한 감상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영화는 200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2010년에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촬영상과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다.

사이코패스
먼저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행 작업으로서 인간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뇌에 대해 스케치 해보도록 하자. 인간의 뇌는 능뇌(hindbrain), 중뇌(midbrain), 전뇌(forebrain)으로 구성되어 있다. 능뇌는 호흡과 심장박동과 같은 교감신경을 조절하며, 중뇌는 잠과 각성을 통제하고 부분적으로는 청각 반응과 지각을 조절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에게 발달되어 있는 전뇌는 가장 늦게 진화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인데, 주로 갖가지 감각 정보들을 통합하고 또 전달하며 감정적 반응들을 조절하는 변연계(limbic system)가 위치해 있다. 이곳에 편도라는 것이 있다. 아몬드 같은 모양을 가졌는데 좌 우뇌에 각각 한 개씩 있다. 해마가 인간의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데 비해, 편도는 감정을 조절하는 곳이다. 진화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류 진화의 최우선적인 과제는 생존이라고 하는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또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기 위해서 발달된 수용체가 편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편도는 소위 생각과 판단이라는 것이 일어나기 전에 자극에 대한 신속한 반응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위협에 대한 반응은 순간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학습된 고통과 두려움, 공포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극이 위험성을 판단하고 반응하도록 지시하는 시상에 이르기 전에 먼저 몸의 반응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뭔가가 날아올 때 순간적으로 눈을 감거나, 어두운 밤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을 때 갑자기 두려움을 느끼는 것, 혹은 낯선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게 되는 일 등이다. 편도는 바로 이런 감정적인 반응을 조절한다. 이처럼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편도에 따른 반응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때로는 매우 정당한 반응일 수 있지만, 때로는 잘못된 반응이고 착각일 수도 있기 때문에 훈련된 통제가 필요하다.

편도의 중요성을 간파한 대니얼 골먼(Daniel Goldmann)은 편도체의 기능에 대한 뇌 과학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해서 감성 지능(EQ)을 주장하였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감정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한다는 경험적인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여러 영화들을 통해서나 우리 사회의 연쇄 살인마 유영철, 강호순 등을 통해 많이 회자된 사이코패스들의 특징은 감정을 통제하는 전두엽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편도의 이상인지, 아니면 심리적으로 복합적인 원인에 따른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들은 고통이나 두려움을 잘 못 느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그래서 극단적인 이기심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의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을 일삼아서 잔인한 연쇄 살인을 범하곤 하지만, 통계에 따르면 연쇄살인범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전체 사이코패스의 숫자에 비해 비교적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대체로 절도, 사기, 강간 등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숫자가 더욱 많다. 일상에서 그들은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데, 거짓말이 탄로 난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고 또 다른 거짓말을 일삼는다.

전두엽은 인간의 발달된 뇌 구조로서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 발달에 결정적이었다. 뇌 연구에 중요한 자극을 주었던 철도 노동자 게이지(Phineas Gage)의 사고로 발생한 전두엽 손상과 그로 인한 인격적인 손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전두엽이 잘못될 경우 비정상적인 삶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는 흔히 “반사회적 인격장애”라 불린다. 사이코패스는 유전적 결함이라는 선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후천적으로 뇌의 전두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사고를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

2010년 하반기 한국 영화계에서는 두 개의 한국영화가 선전하고 있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이다. 두 영화 모두 하드 고어 무비에 가까운 영화로 18금이다. 하드 고어 무비는 한 마디로 말해서 잔혹한 영화다. 범죄 행위를 정보나 사건에 대한 보도로 처리하지 않고 행위 그 자체를 재현하기 때문에 잔인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마치 자신이 피해자로서 당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앵글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감정적인 전율을 극대화시킨다. 흔히는 사지가 절단되고, 머리가 심하게 파손되며, 장기가 적출되거나 파열되는 모습 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극성이 대단히 강한 호러 영화다. 게다가 범죄와 관련되어 있어서 느와르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어둠과 붉음(핏빛)이 만들어 내는 묘한 색채감각으로 인해 관객들이 받는 충격은 더욱 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장르의 영화, 아니 보다 가깝게 느껴보기 위한 표현을 선택하자면, 잔혹한 영화가 한국 사회에서 선전하는 데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 <추격자> 이후에 한국 영화계에서는 스릴러에 대한 관심이 확실히 높아졌다. 물론 영화 외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개봉되었다는 것도 한 몫 하고, 또한 무엇보다 배우의 몫이 더욱 큰 것 같다.

예컨대 <아저씨>의 주연 배우 원빈의 수수한 외모는 수많은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고, 마약 매매와 아동 유괴, 불법적이 장기 매매를 서슴지 않는 사이코패스와 같은 사회의 암적 존재들에 대해 그가 행하는 폭력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붉은 핏방울들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오게 할 것만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반응은 이전과 매우 달랐다. 필자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이런 장면들이 잔혹함보다는 오히려 낭만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는 기사였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상처를 가진 한 남자가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어린 소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열정에 매료되었다는 것인데, 남성들의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희생에 대한 여성들의 향수가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충족되었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원빈의 미모는 여성 팬(심지어 내 아내까지!)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 <악마를 보았다>는 개봉 전부터 상영 제한 판정을 유발할 정도의 혐오스런 장면들로 인해서 회자되었고, 일부 삭제되어 개봉되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영화 자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화제거리가 되고 있지만, 필자 역시 오랜 만에 상업 영화에 출연한 최민식의 냉혈한 연기와 그에 맞서 싸우는 이병헌의 감성적인 연기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콤비네이션으로 인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사이코패스의 잔혹함을 강조한 것이라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간혹 보도되는 인체를 심하게 훼손하여 유기한 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를 생각해본다면, 우리 사회의 현실과 그다지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에게 회자되는 잔혹함은 사건 정보나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실감한다.

하드 고어 무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아 영화감상을 주저하기가 쉽지 않지만, 영화적으로 감상할 수 있고 또 스릴러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한 번 쯤 문을 두드려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이런 장르의 영화들은 그동안 우리 영상문화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감상하기에는 힘든 영화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 주목하면서 어떤 패턴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필자는 다소 이격된 거리에서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잔혹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장르적으로 유사한 장면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감독들이 의도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캐릭터의 패턴을 볼 수 있었다. 이 두 가지를 순서에 따라 정리해보자.

첫째, 두 영화는 장르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낯설지 않은 영화다. 한국 영화계에서 사이코패스들의 잔혹함은 <양들의 침묵>,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외국영화는 물론 한국영화 <검은 집>, <실종>, <추격자> 등에서 다뤄졌고,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적출하는 내용은 <어둠의 아이들>에서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복수와 복수를 재현하는 잔혹한 장면들은 이미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올드 보이><친절한 금자씨>)에서 접할 수 있었다. 사실 박찬욱 감독의 세 영화는 현재 논란이 되는 두 영화가 갖고 있는 많은 장면들을 선행적으로 보여주었다. 복수 3부작을 통해 연출한 몇몇 장면들이나 그 장면들이 주었던 정서적인 충격을 생각해 보더라도 두 영화 속에서 표출된 잔혹함은 관객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장면임에는 분명하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표현에 있어서 보다 더 실제적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즉, 행위의 의도와 실현 과정의 긴장감, 그리고 결과만을 보여주기보다는 마치 현장검증이라도 하는 듯이 행위 자체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더욱 리얼하게 보일 수 있는 장면이 있었지만(진짜 악마와 같은 개가 인육을 먹는 장면 등)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혐오스런 장면이라 해서 삭제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장르적으로 익숙해진 모습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부터 잔혹한 장면들이 많아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나 일본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장면들로 가득하지만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한국 관객의 영화감상 수준이 높아졌거나 아니면 그런 장면에 이미 면역이 되어 정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어졌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둘째, 영화 제작을 지향하는 비평이 아니라 관객의 영화 이해, 특히 기독교적 영화 이해를 지향해 왔던 필자는 영화를 보되 영화적으로만 보고 또 말하기보다는 사실 영화의 스토리나 주제와 관련해서 현실을 보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우리 영상문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하드 고어 무비인 만큼 장르적인 측면에서 할 이야기가 많겠지만 내용과 관련해서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질문은 인간학적인 질문이었다. ‘이런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뇌의 이상에 따른 사이코패스들의 경우는 유전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것이고, 유전적 치료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예방하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이에 비해 다소 사회적인 맥락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유전자의 영향과 사회적인 환경이라는 두 가지 결정적인 요소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형성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함께 고려하고 있는 두 영화는 두 요소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필자는 영화 속의 장면들로부터 불현 듯 이런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고, 이런 질문을 통해 영화에서 어떤 패턴을 인식할 수 있었다.

먼저 <악마를 보았다>를 살펴보자.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수현(이병헌)은 약혼녀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이코패스 경철(최민식)을 응징하되, 그에게 더욱 심한 고통을 안겨줄 계획을 세우고 또 실행한다. 위치추적기를 통해 그를 추적하여 잡았다가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주고 또 풀어주기를 반복한다. 문제는 정작 경철 본인은 고통과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며, 풀려난 다음에는 또 다른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행위를 반복하는 것일까? 아무리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공기관에 맡겨야 한다면서 던지는 이런 질문은 처제의 입을 통해서 강하게 언급되지만 수현은 자신의 행위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며 복수를 포기 하지 않는다. 살인마 경철에게 반복적으로 행하는 복수에서 경철과 수현 두 사람은 어느새 점점 닮아간다. 수현 역시 자신이 처한 실존적인 환경으로 인해 폭력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 고통과 두려움을 잊어버린 사람이 된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범법 행위자이며,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굳이 차이를 드러낸다면, 수현은 오직 살인마에게만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지만, 경철은 누구에게든지, 특히 여성들에게 자신의 악마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수현의 잔혹함은 약혼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이지만, 경철의 범죄 행각은 여성에 대한 병적이고 변태적인 집착증을 보이며, 스스로는 결코 절제하지 못하는 욕망의 표현이자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표출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경시하는 태도다.

이에 비해 <아저씨>의 아저씨(원빈)는 아무 잘못도 없이 오직 자신의 직업적인 이유 때문에 죽어야 했던 임신한 아내로 인해,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큰 죄책감을 안고 사회적으로 철저히 자신을 숨기며 살아간다. 이것은 그가 그토록 도난당한 마약과 불법 장기 매매를 위해 납치된 여성과 그녀의 딸인 소녀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게 된 직접적인 이유이다. 행위 자체는 복수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속죄 행위로 여겨지고, 그 행위의 잔혹함은 사회적 정의를 표현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에 비해 범인들의 잔혹함은, 사람의 인권이나 생명보다는 생명 연장을 원하는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 불법으로 장기를 매매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생명과 돈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락사를 두려워하고 또 주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처럼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안락사 때문이다.

사회적 사이코패스
두 영화를 통해서 필자는 무엇보다 인간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형성되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수현과 아저씨가 공권력을 대신해서 행하는 일들은 법적인 측면에서 보호되어야 할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자신보다 자신의 내적인 동기나 욕망, 그리고 돈을 더욱 중시하게 될 때 사이코패스와 같은 인간의 탄생은 명약관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전두엽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할지라도 명예와 권력과 돈, 그리고 생명연장과 같은 각종 그럴듯한 이유들로 인해 인간을 경시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사이코패스’라고 볼 수 있다. 유신정권이나 5공화국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제부흥이라는 이름 때문에, 혹은 권력으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하얀 리본>은 순수와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에 의해 폭력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잘 말해준 영화였는데, 마찬가지로 사회적 밈(Meme)에 이상이 생겨 형성되는 존재들은 ‘사회적 사이코패스’다.

사회적 사이코패스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량살상은 가장 대표적이며, 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인권을 유리하는 악덕 기업주, 그리고 욕망을 억제 하지 못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수 또한 마찬가지다. 복수를 결행하는 사람들에게 그 대상은 이미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사회적 사이코패스들은 인간을 경시하는 유전자 확대와 재생산의 주범들이며, 이들이 인류 사회에 미치는 막대한 피해를 생각해본다면, 무엇보다 예방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인권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올바로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교회에서부터, 그리고 우리의 학교에서 먼저 철저하게 실행되어야 하며, 특히 교육 기관에만 미루지 말아야 하며 또한 권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인권은 그 무엇으로부터 침해받을 수 없는 천부의 권리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경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 인간과 그런 사회가 어떻게 파괴될 것인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을 경시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되지 못한다.

하드 고어 무비인 두 영화는 이런 점에서 그 잔혹함을 넘어 우리에게 인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사회 영화다. 모방 범죄가 일어나지 않고 미모의 배우나 그들의 연기에 사로 잡혀 메시지를 놓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유독 강했던 영화 감상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원수 갚는 일을 오직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말씀은 우리 안에 사이코패스를 제거하는 가장 좋은 안내자이다.
최성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