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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1 01-02 문 열자, 깃들다

문 열자, 깃들다 1│공간, 관계를 향해 열리다

길과 집이 하나
가가불이(街家不二, 건축가 이일훈의 작품)라는 이름의 다가구주택이 있습니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위치한 이 집은 1997년에 지어졌는데 길과 집이 동체同體라는 의미 있는 디자인을 보여줍니다. 이 집엔 여느 다가구주택과 같은 여러 세대가 동시에 드나드는 큼지막한 현관문 대신 그 자리에 뻥 뚫어놓은 개방형 쌈지마당이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법적으로는 자동차 2대를 세우기 위한 주차장 시설이지만 자동차가 빠져나간 낮 시간대에 이 작은 마당은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또한 인근 시장에서 일을 보고 귀가하는 어르신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잡시 쉬어가는 휴식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곳은 화단을 이용한 벤치가 꾸며져 있는데 독특하게도 미술작가가 설치한 조각품까지 어울리어 이 작은 마당이 범상치 않은 디자인 이슈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이 집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인데 대지에 건물을 앉히는 방법에 있어서 두 개의 덩어리로 나누고 그 중간 부분을 주차장 겸 쌈지마당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지의 고저차를 이용한 지하 1층 부분은 필로티건축물을 지면보다 높여 받치는 형태의 건축 방법의 개념을 두었고, 지상 1층 부분부터는 두 개의 건물을 내부 복도로 연결해서 쓰는 지략을 보여줍니다.

땅을 나누니 길이 되다
건축가는 우리 옛 집의 안채, 사랑채, 곳간채 등이 나누어져 있는 것에서 착안하여 현대건축에서 ‘채나눔’ 설계방법론을 도입하여 실용화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채를 나누니 그 사이에 여유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을 공공에 열어놓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건축주는 건축가의 그 같은 심지 깊은 생각에 쉽게 동조해 주었고, 가가불이는 그 해에 서울에서 가장 각광받는 건축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건축가의 처음 생각은 향후 이 집과 담 하나로 붙어 있는 옆집과 옆집들이 개발될 경우같은 수법의 쌈지마당으로 경사진 지하 1층을 연속으로 잇는 대지 내 골목길을 완성하려는 꿈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건축법이 허용하는 건폐율의 한도 내에서 집주인의 땅이 동네 사람들의 통행로로, 마당으로 거듭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옆집 주인들의 동조에 따라서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필로티 구조의 소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축가의 꿈은 그 집, 가가불이 한 채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내 집 땅을 외부인에게 개방한다거나, 내 공간을 나눠 쓴다는 것이 말이 쉽지 실상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같은 건축가의 좋은 생각은 이미 많은 건축가들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최근 주변을 돌아다 보면 집 속에 길을 넣는 가가불이와 같은 설계방법론이 주택뿐 아니라 공공건물, 상업건물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장소에서 적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만큼 오늘날 우리 이웃들의 생각이 열리고 발전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더불어 열린 공간, 열린 건축을 지향하는 건축가들의 선언도 늘고 있습니다. 덩달아 도시도 공공에 열리는 디자인 전략으로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간의 미학은 관계의 미학이다
이젠 관계의 미학을 공간으로 담아내는 노력이 현대건축에서는 또 하나의 경향인 듯합니다. 과거 근대주의자들의 기념비적 건축의 시대에 쉽게 무시하고 지나쳤던 수용 미학적 관점의 측면이 오늘날 높게 평가되면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내적 공간과 외적 공간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리하기보다는 관계 맺기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같은 공간을 생성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궁리도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 중이기도 합니다.
집도 절도 없는, 가난한 이웃들의 거주 공간을 만들어주는 ‘해비타트운동’과 같은 부류의 재능을 기부하고 재산을 나누는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붐입니다. 자연재해를 입은 이재민들의 정착을 돕는 건축 공간 만들기에 자금, 기술, 노동력 기타 여러 유형의 기부 형태가 모여 나날이 쇠퇴해가는 휴머니즘의 새로운 탑을 쌓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끔찍한 현실도 상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 사는 단독주택, 아파트의 현관문은 굳게 닫혀 버렸고, 도심의 큰 사무실들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전자식 잠금장치로 꼭꼭 닫혀 있습니다. 잡상인으로 통칭되는 관계없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제스처가 이 땅의 전통적인 공동체 생활을 비웃은 지 오래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시설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가 이뤄지지 않는 심야의 시간대에조차 이 추운 겨울을 거리에서 나야 하는 노숙자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노숙자를 교화하는 제도적 차원에서, 또는 종교단체 차원에서 노숙자지원센터가 문을 연 곳도 더러 있지만 아직 세상은 어둠의 장막이 넓게 드리워 있습니다. 좀 더 많은 곳에서 공간을 개방하고 나누는 빛이 발하기를 염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생의 마지막 날에 지상에 남겨 놓으신 것 중에서 으뜸은 나눔의 정신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디자인 문화의 시대라 일컫는 오늘날 건축이 나눔의 정신 아래서 행복한 세상을 여는 도구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전진삼|건축리포트 <와이드AR> 발행인, 광운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