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100년만이라지만 작년에도 있었던 폭우와 물난리, 한일간 독도 문제, 前 대통령들의 회고록 등 하루 하루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 같은데도, 각 신문사마다 ‘청년실업’ 관련기사를 우선하는 걸 보면 이보다 더 자극적인 소재는 없는가 봅니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을 넘어 삼포세대가 된 우리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사모, 그 이름의 무게

삼포세대란 말을 아시나요? 가족 구성에 필요한 세 가지,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말합니다. 이것들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바로‘ 돈’때문입니다.‘ 분유와 기저귀 값이 만만치 않아서’,‘ 결혼식과 신접살림 마련을 할 수 없어서’를 넘어서서 이제는 ‘연애할 돈’도 없습니다. 통신료를 못 내는 바람에 전화가 끊겨 연락을 못했던 것인데도, 차마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어 연락이 뜸하다고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를 잡을 수 없었다는 기사를 읽고 얼마나 한숨이 깊이 나오던지. 그런데 여기, 이 문제에 더하여 더 깊은 고민에 빠진 남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우리(들의) 전도사님’입니다. ‘전도사’라, 그렇죠. 앞으로 목회를 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지닌 직함이지요. 단순히 연애만 하고 말아야겠다, 생각하면 또 모르지만,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질 거라 보는 자매들에게 전도사님과 연애는 흔히 고민하게 되는 경제적 불안정, 치솟는 물가에 덧붙여 장차 목사의 아내(사모)로서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의무감을 품게 합니다. 이 무게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많은 어머니들께서는 당신의 딸이 제발 ‘사모’만큼은 되지 않기를 바라실 정도입니다. 게다가 몇몇의 자매들이 사명감을 실어 말하는‘ 사모가 되겠다’는 선언은 또 얼마나 비장한 것인지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그만큼의 다짐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저 고개를 끄덕입니다. 분명, 쉬운 자리는 아닙니다.

최우선 조건, 사명 공유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전도사님이 만나고자 하는 자매에 대한 기준입니다. 그 자매의 성격이나 외모보다 먼저 보는 것은‘ 사모가 될 마음’과‘ 사모로서 자질’의 유무입니다. 성격이나 그밖에 다른 것이 마음에 들어 열심히 사랑하고 결혼하려고 하는데,‘ 난 사모는 하기 싫어’라고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겁니다. 또 결혼을 해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부인이‘ 사모’로서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그때 가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죠. 실제로 우리(들의) 전도사님의 선배 중에는 배우자가 허락하지 않아서 목사안수를 받고도 목회를 할 수 없게 된 분도, 목회를 반대해서 결국엔 이혼을 하게 된 분도 계신다고 해요. 그런 얘기를 들을수록 우리(들의) 전도사님은 결혼에 대해 점점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이쯤 되면‘ 삼포’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기혼자를 우대합니다. 대체적으로 가정을 이룬 후에 찾아오는 안정감과 책임감이 우리(들의) 전도사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때문이지요. 아차, 그런 얘기도 들었어요. 개척을 하면 더더욱 사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피아노 반주부터 시작해 교인들과 유대, 상담, 주일학교 교육 등 가장 가까이에서 믿음직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하는‘ 무급’ 동역자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에요.

불완전한 둘, 완전한 하나를 꿈꾸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요즘 전도사님의 대체적인 마음가짐을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부당해요!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상대를 너무 기능적으로만 보는 겁니다. 사모로서 자질을 갖추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순간들을 어떻게 연애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앞날에 대한 꿈을 나누는 시간은 앞으로 사역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심층 면접이 될 겁니다. 표현이 너무 과했나요?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어떤 자매가 앞으로 사모가 되기를 꿈꾸며, 형제들을 만난다고 해요. 거듭되는 만남을 통해 앞으로 이 형제가 큰 교회를 섬길 것인지 개척을 할 것인지, 설교는 잘 하는지, 찬양 인도와 성경공부는 어떻게 하는지 등등을 하나씩 점검 중이라면 어떠시겠어요? 너무나 뻔한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후에 하와를 만드신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더 잘, 더 완벽하게 지키라는 목적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2:18)’, 이 단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심지어 그‘ 돕는 배필’로 지음 받은 하와는 아담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대등한 동료였지요. 또한 이런 태도는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점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얼마나 완벽한 짝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아니, 세상에 완벽한 짝이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요?

나 자신 하나 예수님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기 어려운 시대에 둘이 함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선을 이룬다는 것은 아마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벽한 짝에만 집중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한 가정을 세워나갈 수 있는 데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며 함께 온전해지도록, 또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요. 그러니, 우리(들의) 전도사님, 그렇게 풀 죽어 계시지 마세요.
글 원유진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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