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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사람과 사람

노인을 위한 극장, 추억을 상영하다 l 허리우드 클래식 김은주 대표

종로구 낙원동의 낙원상가 4층은 늘 영화를 위한 공간이었다. 서울아트시네마와 허리우드 클래식, 두 극장이 자리를 절반씩 나눠 쓰는 이곳은 평소 영화학도나 영화감독 지망생, 예술영화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지상의 시야에서 좀 떨어져 비대중적인 영화를 즐겁게 나눠보고 소통하며 함께 공부하는 공간이다. 그런가 하면 이곳은 주일 4시마다 일반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쓰임새로 활용되기도 한다. 허리우드 클래식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시행하는 노인들을 위한 무료상영회 때문이다. 한 시간 전부터 줄서서 입장권을 받고 열심히 소감문을 작성하는 어르신들로 크지 않은 로비는 순식간에 꽉 차고, 아무것도 모르고 극장을 찾은 젊은 관객들이 도리어 움찔하고 놀라는 시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지만 ‘노인을 위한 극장은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허리우드 클래식의 김은주 대표를 만났다.                                                        

사 람 을 위 하 는 꿈 의 공 장
상영관 입구에 ‘실버영화관’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 옆으로 서울시에서 홍보를, SK케미칼에서 후원을 맡았다는 문구도 조그맣게 붙었다. 극장을 운영하긴 하는데, 주된 고객이 노인이라, 입장료를 일반인과 똑같이 받을 수도 없을 텐데…. 조금의 염려를 안고 입장료가 적힌 티켓부스를 들여다보았다. 주일 오후에 정기적으로 여는 무료상영회를 제외하고, 평일에는 오전부터 3회 동안은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입장료는 2천원. 10명 이상의 단체관람이면 1천원으로 할인도 된다. 이건 극장 입장에서 수지가 맞을 수가 없는 약속이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이유가 궁금해 질문하자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씩씩한 대답이 돌아온다.
“누구나 나이를 먹게 마련이잖아요. 여러 세대가 어울려 함께 살면서 그 누구보다 소외되어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 노인들이에요.” 그러니까 답은 간단하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살고 있다면 아동이나 청년들, 중장년층까지도 즐길 수 있는 문화 거리가 많은 편이다. 극장을 찾더라도 좀 빠른 편집이나 과감한 영상에 처음엔 좀 당황하다가도 비교적 쉽게 적응하고 흐름을 따라간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어렵고, 어지럽고, 불편한 문화로 인식되면서 이내 접근조차 포기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문화가 얼마나 어르신들에게 인색한지, 이들을 위한 배려에 빈약한 문화인지 김은주 대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신문광고를 보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포스터를 봐도 사진밖에 없고, 글씨는 깨알처럼 작아요. 그나마 정보들은 죄다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죠.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홍보는 입소문의 덕이 커요. 한번 와보신 분들이 친구들을 모시고 또 오시는 식으로요. 그만큼 느리기도 하지만 이미 단골 관객도 많이 생겼지요. 한 1년은 적자를 보더라도 그대로 가자는 계획입니다. 버티다 보면 지금은 미약해 보이는 빛이 더 크고 또렷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오 래 된 추 억 을 팝 니 다
김은주 대표가 처음부터, 늘 이렇게 실버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좋은 고전영화를 의미 있게 상영하고 싶은 욕구만으로도 일을 시작하기엔 충분했던 셈이다. 극장을 인수하고 시장조사를 하는데 바로 옆의 탑골공원이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 종로라는 유서 깊은 위치, 무방비상태로 광장에 던져진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엇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야기를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다가왔다.
대기업 멀티플렉스가 작은 극장들을 잠식하는 시기에,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 어르신들로 주고객층을 특화시킨 것은 사업적으로도 잘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어르신들이 이곳에 오셔서 좋아하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매표나, 수표나, 여러모로 옛날 방식 그대로라는 거예요. 어르신 혼자 또는 몇 분이서 멀티플렉스를 찾으면 뭔가 너무 복잡해서 입장권을 끊기조차 어려워 보이거든요.”
마침 김은주 대표가 운영하는 또 다른 극장인 드림시네마를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울경찰청 옆, 오래도록 ‘화양극장’으로 사랑받았던 서대문역 사거리의 그 오래된 건물. 이제는 정말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손으로 그린 옛날식 영화 간판이며, 극장 문을 열면 맞이하는 작은 매표소. 드라마 세트장을 떠올리는 아담한 로비와 상영관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밀려드는, 천정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 나곤 하는 약간은 눅진하고 차가운 오래된 극장의 냄새. 지금은 공연전용관으로 리모델링 중이라 한동안 만날 수 없겠지만 그때 그 로비를 꾸몄던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이곳 허리우드 클래식에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이 실버영화관은 어른들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어요. 옛날의 추억을 건드리는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요.” 어르신들이 <벤허>와 <로마의 휴일>을 보시고 즐거운 것은 옛날의 추억이 복기되기 때문이다. 옛날에 극장구경 갔다가 저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즐겼던 추억들이 넘실대는 과거로의 여행.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얼굴이 생기에 넘친다. 식구들끼리도 서로 바빠서 대화가 사라진 요즘, 영화를 소재로 끊어진 대화를 이을 수 있지 않을까. 관계가 단절된 우리의 어르신들에게 ‘말’을 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어느 순간 절절하게 가슴까지 전달되어 왔다.


순 한 영 화 관, 배 려 하 는 교 회

이쯤 되니 프로그램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어르신들에게 ‘체하지 않는
영화’를 보여드리는 거예요. 야한 영화, 싸우는 영화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하시거든요. 평일의 기본 상영작은매달 주제를 잡아 프로그램을 짭니다. 5월 테마는‘ 청춘을 돌려다오’였어요. 옛날에 재밌었던, 학창시절이 생각나는 영화들. <고교얄개>, <괴짜만세> 같은 식이었죠. 6월은 호국의 달이니까 <님은 먼 곳에>,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정도로 잡았고요. 7월 주제는 춤바람으로 잡았습니다. <더티 댄싱>, <자유부인> 그리고 <토요일 밤의 열기> 등이 올라와 있어요.”
이 영화들이 당연히 필름으로 상영해야 하는 반면 주일의 무료상영작들은 DVD 상영이 가능하므로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주로 50년은 지난 고전영화 중에서 선택하고, 상영 전에는 영화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상영후에는 영화에 대한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장문의 편지를 써주는 열혈 팬도 많다. 주일이면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오는 관객도 많겠다 싶은데, 마침 그 이야기도 꺼낸다“. 교회에 갔다가 점심을 드시고 오시는 어른들이 많으세요. 예배 끝나고 집에 가면 소일할 것도 없이 TV 보면서 지루해하시는 어른들인데, 삼삼오오 와서 고전영화를 보시는 모습이 참 바람직한 것 같고. 그래서 영화 선정하면서 신경이 정말 많이 쓰입니다. 영화 틀어드리고 나면 어른들이 손잡고 너무 좋았다고 감동하시곤 해요. 그걸 볼 때마다 나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는걸 확인하지요.”
교회 입장에서 주된 성도는 노인층인데, 기독교가 어르신을 위한 문화 콘텐츠에 너무 무신경한 것 같아서 김은주 대표는 영 아쉬운 표정이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극장을 빌려다 실버영화제도 하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바가 많은데, 어째서 교회는 할 것도 많은 청년들만 못 붙들어 안달하면서, 노인들에게는 그다지도 무관심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청년들은 놀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노인들은 달라요. 그분들을 끌어안는건 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만큼 열심히 출석하는 교회의 기둥인데, 인정을 해줘야죠. 어르신들이 없으면 교회는 무너질 걸요.”

교회도 그렇고, 가을마다 열리는 기독교영화제도 그렇고, 좀 더 노인을 위한 서비스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이분들이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게 아니라고, 반복해서 당부하는 김은주 대표의 관심과 내공은 이미 노인 전문가의 수준. 기자에게 부모님 모시고 언제든 들러보라고 초대하는 선한 마음에 흠뻑 취하고 만다. 한동안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고 시끄럽던 낙원상가 철수도 10년가량 늦춰진 모양이니, 이루고 싶은 것을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이 이럴 때 통하는 것도 같다. 어디서든 그렇듯, 지치지 않고 꿈을 품는 마음이 고달픈 만큼 또 값지다. 
글 이은정 | 사진 노영신


허리우드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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