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 종료/책 읽는 마음

말 거는 법을 잊은 그대에게

어느 멋진 하루|가와카미 히로미


사람은 누구랑 대화를 나눌까? 실없는 질문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잠깐만 짬을 내 생각해 보면 그리 실없는 건 아닐 수도 있다. 일단 동물과 대화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한 걸로 다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렌느 페퍼버그 같은 이는 ‘천재’ 앵무새 알렉스와 함께 우정과 환대를 나누었다. 알렉스는 피곤할 때 피곤하다 말하고, 이렌느가 힘들 때 옆에 다가와 다독여주며 힘내라고 하곤했다. 내 생각에는 제인구달도 원숭이와 대화를 했을 것 같다. 물론 거기에 같은 ‘언어’가 등장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이 동물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맞는 것 같은데(사실 이건 동물의 기호를 우리 식으로 판단하려 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확실치 않은 것 같다. 만약 둘이 서로 못 알아듣고 있었다면 과연 수십만 년 동안 개와 고양이와 닭과 소는 어떻게 사람과 함께 살았을까. 아마 어떻게든 소통은 하고 산 것 같다. 그렇기에 대화했다고도 말할 수는 있을 듯하다.
그럼 동물 말고는 어땠을까. 우리는 성경에 나온 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십계명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 참 많은 신들과 만났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게다가 성경에 나오는 마귀들이나 천사들과 대화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여호와 하나님보다 그들이 멀리 있지는 않았다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아, 물론 그들을 섬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과 ‘대화’를 했을 거다. 사람들은 주위의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에서 친숙한 ‘정령’같은 것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정령’들은 친숙해서 구태여 섬길만한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과 늘 대화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기계문명이 도래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생하면서 ‘과학적’이지 않은 그 친숙했던 것들은 ‘없는’ 것이 되거나 ‘진리가 아닌’ 것이 되었고, ‘밝힐 수 없는’ 것이기에 잊혀져버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을 거는 법을 잊어버렸다. 동물과 말하는 건 실 없는 짓이 되었고, 정령과 대화하는 것은 황당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환영할 수 없게 된 거다. 덕택에 동물과 대화하지 않고, 밀렵하거나 가두거나 잡아먹으며, 우리의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채 그들을 없애기 위해 혈안 되어 200여 년을 살아왔다. 그렇게 200년의 습관을 쌓은 우리가 그들과 다시 대화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일단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에게 납득될 무언가를 설명하라고 강요할 수 없진 않을까. 환대하면서 우리 바깥의 세계에 말을 걸면서 어떻게 우리는 살 수 있을까. 과거로 세상의 시계를 돌리는 것이 아닌, 대화하며 ‘우리의 시간’을 만드는 일. 그런 시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글 양승훈


<오늘> 블로그(www.cultureonul.com)의 방명록을 통해 위의 책을 신청하시면 추첨하여 선물로 보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