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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종료/책 읽는 마음

죽음을 뒤로하고 들려오는 삶의 선율

빛 속에 숨다|그래그 도슨


8살 잔다에게 모든 것은 호기심이었다. 거리를 걸으면서 가게에 늘어져 있던 장신구들과 옷들 그리고 인형, 또 군것질 거리 모두.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길거리의 풍경을 맡아냈다. 그녀는 들은 모든 선율을 손으로 따라 할 수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 은 이미 그녀의 몸이 기억했고, 그녀에게 학교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는 늘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빠는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8살 잔다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녀의 선율은 주위 사람들을 모두 매혹시켰다. 그녀의 ‘즉흥 환상곡’은 몇 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국립 음악원의 교수들마저 울려 버렸고 그녀에게는 13살 나이에 이미 평생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자리가 보장되었다.

언뜻 들으면 어떤 천재 음악가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레닌의 ‘신경제’라는 그나마 소비에트 러시아의 ‘황금기’에 살지 않고,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시작하는 시절을 살았다. 그녀에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세상 안에 어른들의 정치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집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려둔 생선과 고기를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 13살이 지나가는 해에 누구의 책임을 묻기 전에 전쟁의 참화가 시작되었다. 코미디극에서 슬랩스틱으로 서로 쥐어박는 장면도 얼굴을 찌푸리면서 보기 싫어했던 잔다에게 전쟁은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은 잘 알지도 못했지만, 사실 그녀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생생하게 나타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참화가 비참함의 전부는 아니다. 유대인의 ‘운송 책임자’ 아이히만의 입으로 증언되듯, ‘최종 해결책(가스실 학살)’이 있기 전에 이미 잔다가 살고 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나치에 의해 6개월 동안 1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다. 총 외에도 상상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유대인의 말살을 위해 동원되었다. 그리고 항상 한 마을에서 ‘공존’하던 모든 이들은 모두 처절하게 공동체를 해체하고 공동의 적인 ‘유대인’들의 학살을 묵인하고 또 동조했다.

잔다의 아빠가 잔다와 동생 프리나에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살아만 남거라!”라며 딸들을 학살의 현장에서 이탈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죽음의 광기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두 자매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나치 장병의 위무를 위한 공연을 시작한다. 잔다와 프리나의 음악은 늘 죽음의 현장을 뒤로하고 빛이 되어 등장했다. 죽음의 현장의 더러움은 늘 그들의 음악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녀들은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도, 배울 수도 없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따뜻함을 주었다. 아빠가 강하게 심어준 ‘삶의 의지’가 모든 사람에게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줄기의 음악이 중요한 것은 여전히 위로 받을 영혼들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글 양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