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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12 05-06 가족관계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 특집 1 _ 나를 지탱하는 벽, 가족


가족 해체 현상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그래도 지치고 힘겨울 때 가장 큰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건 가족이리라. 그러나 한편,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짚어 보게 만들었던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을 ‘아무도 보는 사람만 없다면 슬쩍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들’ 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을 격하게 부정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문제는 이에 공감하는 이들의 수도 만만치 않으리라는 사실이 아닐는지. 누군가에게는 ‘가족’ 이라는 단어가 더없는 안정감을 주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런저런 이유로 지긋지긋한 짐이자 굴레에 불과한 것이 가족이니까.

내친 김에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볼 일은 여자에게 시집, 남자에게 처가가 진정한 가족일까? 하는 의문이다. 솔직히 혈연이 아닌 혼인이라는 절차와 형식으로 맺은 인연이기에 끈끈함이 덜한 건 당연한 일이지 싶다. 그렇다 해도 예전에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의무와 책임만큼은 결코 덜하지 않은 이 새로운 인연에게 도무지 정을 주기 어려움을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게 사람의 도리이지 싶어서. 하지만 요즘 젊은 여성들은 놀랍게도 거침없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내를 보인다. 심지어‘ 능력 있는 고아’와 결혼이 소망이라고 제 입으로 얘기하는 발칙한 처자들까지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KBS2 주말극 <넝쿨 째 굴러온 당신>의 차윤희(김남주)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인품 좋은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잘 자란, 존스 홉킨스 출신의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와 결혼하는 것으로 꿈을 이뤘다며 의기양양해 하던 윤희. 하지만 고아인줄 알았던 남편유준상이 기적적으로 부모를 찾은 터, 그녀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랄 밖에. 게다가 알고 보니 세 들어 살게 된 주인댁 부부장용, 윤여정가 마침 친부모였던지라 복이 달린 넝쿨인 줄 알고 냉큼 주워들었더니만 뒤에 엄청난 대가족이 줄줄이 달려 나오는 형국이다. 한 마디로 말해 쌤통이긴 한데, 능력 있는 고아와 결혼하고 싶다. 가슴 섬뜩한 소리지만, 또 어르신들이 들으시면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지만 이게 단지 드라마 속 얘기만 아닌 것을 어쩌랴. 예전 며느리들은 평생을 쥐죽은 듯 참고 살았다지만 지금은 남편이 차라리 천애 고아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세상인 것이다. 시부모님을 돌아가시라고 축수 기원할 수는 없는 일이니 차라리 애당초 부모 없이 자란 고아와 결혼하는 게 백번 낫다고들 한다나. 이름은 가족이나 마음으로는 원치 않는 인연,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안타까운 와중에 한쪽으로는 새로운 갈등이 야금야금 자리를 넓혀가기 시작했으니 요즘 젊은 부부의 이혼 사유 1위라는 장모와 사위 간의 피 말리는 줄다리기, 즉‘ 장서갈등’이다. 실제로 주변 얘기를 들어봐도 사위사랑은 장모라느니, 사위가 백년손님이란 말은 이제 옛말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현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지 싶은데 처가의 도움 없이 육아와 맞벌이를 병행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장서갈등’이라는 신풍조가 탄생한 것이라고. 아내 입장에서 마음 편한 친정 쪽에 아이를 맡기는 일이 흔하다보니 예전 같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일어날 감정 대립들이 장모와 사위 사이에도 만연할 밖에. 하기야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를 않는다는 옛말도 있지 않던가. 어쨌거나 오랜 세월 질기게 이어온 고부갈등도 아직 해결을 못 본 마당에 어느새 새로운 갈등이 생겨났으니 기막힌 노릇이 아닌가.

가족이라는 따스한 단어로 한데 묶여 있으나 실은 남보다도 더 껄끄러운 사이, 시집과 처가. 과연 이 엉킨 실타래를 속 시원히 풀어낼 방법은 없는 걸까? 흥미로운 건 발칙한 며느리의 이야기 <넝쿨 째 굴러온 당신>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집안의 며느리지만 친정에서는 시누이인 윤희가 시누이로서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윤희의 남편 귀남 또한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끼어 갈팡질팡하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해답이 되어주고 있다는 점.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오빠가 사업을 한답시고 윤희 부부의 돈을 솔찮게 탕진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윤희는 올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빠의 무능함이 올케 탓이 아니라 친정어머니김영란의 과잉보호 탓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친정어머니가 올케 험담을 늘어놓을 때마다 맞장구는커녕 오히려 올케 변호에 나서는 윤희, 확실히 진일보한 시누이가 아니겠나. 한편 할머니강부자에게서 자신이 할아버지가 생전에 끔찍이 아끼는 손자였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귀남은 할아버지 제삿날 아내 대신 음식준비에 나서 온 가족을 기함케 한다. 그리고 네 댁이 할 일을 왜 네가 하느냐며 말리는 할머니에게 던진 그의 한 마디에 귀가 번쩍 틘다. “할아버지는 제 와이프 얼굴도 모르시잖아요.” 윤희와 귀남 내외의 현명한 처신으로 인해 답답했던 양가에도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하기야 내가 사랑하는 이의 가족이거늘 왜 불편해하고 왜 미워하겠나. 불합리하고 부당한 관계가 아니면 불편할 까닭도 눈 흘길 이유도 없다.

가족이라는 허울을 씌워 간섭하고 구속하려 들 게 아니라 마음을 열고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 못할 것이 어디 있으리. 시집도 처가도 다 내 마음 먹기에 달렸지 싶다. 마음먹기에 따라 ‘아무도 보는 사람만 없다면 슬쩍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들’이 얼마든지 나를 지탱하는 벽이요, 내 자식들의 울타리로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석희|텐아시아, 엔터미디어, 한겨례 등의 매체에 방송 관련해 발칙하지만 통찰력있는 글을 연재하는 칼럼니스트. MBC 옴브즈맨 프로그램 <TV 속의TV>에서 방송과 시청자 사이의 통로 역할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