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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8 09-10 미디어 2.0 시대, 달라진 소통

미디어 2.0 시대, 달라진 소통 5 | 미디어 2.0 시대, 교회는 소통하고 있는가

 

광우병 전염 우려가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여 촛불집회가 일어났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촛불소녀’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급식 당하는 주체로서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 도도한 촛불 바다의 시원(始原)이었다. 이윽고 ‘하이힐 20대’와 ‘유모차 부대’의 합세로 이른바 ‘광장의 여성화’가 이루어지자, 촛불집회는 독특한 시위문화를 가다듬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미친 소는 너나 드세요”, “2MB를 점지하신 삼신할미 각성하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재기발랄한 구호들은 우리 사회가, 아니 이 시대의 민주주의가 한층 진화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홍해를 건넌 후 노래했던 미리암처럼

8월 9일이면 100일째란다. 폭력진압과 강제연행의 공포 속에서도 연약한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비록 미국산 쇠고기를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리하여 ‘해봤자 안 된다’는 고질적인 열패감이 다시금 고개를 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촛불의 의미 내지 성과가 희석될 수는 없다는 것,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요컨대 촛불 바다는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 것이다. 마치 히브리 백성에게 홍해가 이집트 노예 시대와 광야의 자유 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듯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에 명시된 문장을 심각하게 구호로 외치는 사람과 가볍게 노래로 불러제끼는 사람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촛불은 근대와 탈근대, 웹 1.0과 웹 2.0을 날카롭게 대비시킨다. 촛불의 바다를 건넌 우리는 이미 ‘탈근대/웹 2.0’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아하, 그래서 홍해를 건넌 히브리인들이 미리암(역시 여자다!)의 주도 하에 춤추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했구나. 거친 구호나 슬로건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일상의 노래와 춤인 것을 일찍이 꿰뚫어 보았으니, 출애굽의 여예언자 미리암이야말로 전근대 시대의 탈근대인이겠다.


벽을 허물었던 예수님, 문을 열어야 할 교회

바야흐로 새롭게 열린 웹 2.0 시대의 대중은 더 이상 지배와 통제, 독점과 소유라는 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동화되지 않는다. 휴대폰과 디지털 카메라, 노트북 컴퓨터 등 첨단 기계로 무장한 채 블로그와 아고라를 누비며 소통과 공유, 참여와 분산을 익혀온 그들이기에 ‘명박산성’ 따위로 벽을 세우는 일은 도리어 조롱거리만 될 뿐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집단지성은 벽이 아니라 문을 원하고 있다. 단절이 아닌 소통을, 분리 대신에 연결을 간절히 소망한다.

이러한 터에 교회는 시민사회의 대중에게 벽일까, 문일까? 인종과 계급과 성별을 나누는 그 어떤 벽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용지물이라고 선언한 바울의 당찬 고백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도 과연 통용되고 있는가?(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3:28-)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에 급격히 늘어난 교회 이탈자의 수와 안티 기독교인의 수는, 교회를 향해 아무리 “열려라, 참깨!”를 외쳐보아도 문이 열리기는커녕 벽만 자꾸 높아지는 데 대한 절망과 저항의 표현이 아닐까?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귀머거리 행세를 하는 교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독교는 가장 인기 없고 경쟁력 없는 종교로 뒤쳐질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를 향해 ‘개독교’라 손가락질하는 대중의 반감과 혐오는 한국교회가 시대의 흐름에 거슬러 복고반동적으로 전근대적인 가치를 주입하고 강요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목회자의 제왕적 리더십이 통하고, 그에 따른 신도의 절대 충성이 요구되며, 남존여비 사상에 근거한 유교적 가부장질서가 여성의 의식과 행위를 규율하는 마당이니, 과연 ‘개념 없는 종교’라고 외면당하기 십상 아닌가? 


성육신, 만물과 소통하신 사건

소통의 기본은 듣는 것이다. 입은 닫고 귀는 열어야 한다. 이러한 들음이야말로 생명을 낳는다. 예수가 오죽하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누차 외쳤을까? 하나님의 음성도, 사람의 소리도 아예 듣지 못하는 교회를 향해 정현종 시인이 야단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

통(通)하려면 벽을 허물고 문을 열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훈시하고 선포하는 오만한 자리에서 내려가 대중이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를 찾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성육신, 곧 예수 사건과 성령 강림 사건도 만물이 소통하는 언어에 관한 아름다운 성서적 은유가 아닌가? 이미 ‘탈근대/웹 2.0’ 시대의 강을 건넌 한국교회는 이제 소통을 화두로 삼고 어떻게 하면 대중과 더불어 예수의 복음을 공유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일이다.

아, 오늘날 게토화된 교회에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교회 안팎을 넘나들며,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꽃피우는 예수의 이야기가 자리할 공간은 어디일까? 블로거(Blogger) 예수의 재림이 새삼 그리운 시절이구나.



구미정|여성과 생명을 화두로 신(神)나게 강의하고 글 쓰고 목회한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 여성목회연구소 연구실장, 한국여성신학회 총무로 섬기는 중이다. <이제는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윤리>, <한글자로 신학하기> 등의 책을 지었다. 011-9566-0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