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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ITY/두 손을 모으다

방랑과 머무름의 미학ㅣ산마루영성클래스 이주연 목사

에디터 노영신



소박한 흙내음이 살며시 몸을 깨우는 아늑한 방, 편안하고도 진지한 공기가 꽉 차 있다. 산마루영성클래스 화요모임이 막 시작되었다. 깊은 날숨과 들숨을 통해 몸을 충분히 이완시키는 시간. 한 순간도 멈춰본 적이 없는 숨이 낯설게까지 느껴진다. “영성수련이란 반복입니다. 이 지루함을 극복하는 길에 영성이 있습니다. 반복할만한 가치를 아는 자가 계속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숨은 곧 몸과, 마음과 하나가 되어 휘몰아쳤던 생각과 감정의 바람을 점차 잦아들게 한다. 기독교사상 주간과 대한기독교서회 출판국장을 지내던 8년 전 어느 날, 문득 새로운 목회의 길로 들어서서 산마루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를 개척했던 이주연 목사. 매일 한 통씩의 짧은 글로 영성생활의 깨달음을 돕는 ‘산마루서신(현재 246,734명의 가족)’으로 더 유명한 그가 이제 부암동 작은 토담집에서 ‘산마루영성클래스’를 열어 영성의 여정을 가고자 하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검은 뿔테안경이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그의 삶과 영성, 그리고 목회의 길을 함께 되돌아보았다.


부암동 산골에서 다시 태어난 시공간

부암동에서 시작되는 북악스카이웨이를 조금만 지나다 들어가면 화들짝 놀랄 만큼 ‘도시 속 시골’의 진풍경이 펼쳐진다. 뭔가에 홀린 듯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숲 속의 작은 마을이다. 한 송이 해바라기가 온 몸으로 인사하는 막대기 문을 넘어 돌계단을 오르니, 나지막한 토담집, 산마루골영성수련센터에 다다른다. “3년 전에 이 집을 빌리게 되었어요. 바닥 장판과 벽부터 창문틀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제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주인이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리 애쓰냐고들 하는데, 달라면 주면 되고, 그러면 더 좋은 것을 주시겠죠, 뭐.” 그가 정성을 들였던 만큼, 다 스러져 가던 한 농가는 운치 가득한 토담집이 되어 영성수련의 좋은 공간이 되어 주고 있다. 공간이 다시 태어나듯, 이곳에서의 시간도 그저 흘러가는 자연적 시간에서 그 분의 섭리와 일하심이 실현되는 카이로스적 시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silence, stop, spiritual sensitivity’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분 앞에 몸과 마음을 고요히 멈출 때에 영적 감수성은 살아나고, 그 민감함이 마음을 읽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멈추지 못하고, 넘어질까 봐 계속 달리기만 하죠. 넘어져도 괜찮아요. 넘어져서 오히려 망가져봐야 일어설 수 있어요.” 나를 비우면 그 분의 섭리에 나를 맡길 수 있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살게 된다고. “제자는 낫고자, 진리를 발견코자 스스로 찾아옵니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한 것이 ‘산마루영성클래스’의 시작이었다. 현재 매주 월(목회자), 화, 토요일에 열리고 있는 영성클래스는 특별한 커리큘럼도, 회비도, 조직도 없다. 그저 말씀과 삶,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솔직하게 나누며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으나, 분명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에게 그런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기에. 


둥둥 영혼을 깨우는 소리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학창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돌아가시면서 그에게 삶이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것이었고, 생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그를 목마르게 했다. 어릴 때부터 38세까지 이어졌던 ‘낯설음’에 대한 숨 막히는 공포 또한, 그의 영혼이 쉴 곳을 찾지 못하게 했다.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들어갔던 신학교였으나 어디에서도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기도 했었다고. 그러다가 87년 ‘영성’이라는 길을 만나면서 자신을 괴롭게 했던 질문이 불필요한, 하찮은 질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제도적 틀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기에,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과 두려움 등으로 위축되어 왔던 자신의 영혼이 드디어 해방을 맞게 된 순간. “끝없이 이어졌던 본질적인 질문과 영혼의 갈증이 오히려 영성수련의 중요한 주제와 모티브가 되었어요. 영성의 길은 결국, 자신의 아픔과 상처, 병과 혼란, 질문과 어두움을 붙들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깨어남과 치유를 경험하며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사랑과 일치되는 것이죠.” 그 이후 그는 자신이 기도할 때에 불치의 병이 든 사람들을 낫게 해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경험을 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관념적으로만 탐구했던 예수님을 다시 새롭게 만나게 된 계기가 된 것. “저에게 예수는 더 이상 분석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어요. 만나야 할 분이었죠. 그리움의 대상, 살아계셔서 함께 하시는 분이 된 거죠.” 지식으로서의 신학을 놓을 수 있었던 이 순간을 스스로 신학적 회심이라 부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이런 과정과 함께 다가오는 21세기를 공부하고 영성과 문화와 예술의 시대를 예견하면서 이에 맞는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존재에 대한 질문을 풀어갈 수 있는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고요.”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21세기가 시작되는 해의 부활절, 이주연 목사는 자신의 집 마루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 가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산마루교회를 처음 시작했다. “기독교사상을 만들면서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그렇게 떠들어 왔으니까, 떠든 내가 책임져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아무리 그래도 교회 개척의 시대가 끝났다고들 하는 이때에, 예수 없는 교회를 보며 희망이 없다고, 교회의 존립 자체를 의심했던 그가, 다시 교회로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 신비한 체험이 있었는데, 제가 죽어서 주님 품에 안겨 들려올라가는 것을 보았어요. 계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감동이 다시 살아나면서 이끌림을 받았죠. 제 생의 소명이라 생각해요.” 그 언젠가 기성 교회에 대한 날선 비판을 옹골차게 내뱉던 그 서늘함을 더 이상 함부로 품을 수 없었단다. 새로운 시대의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고자 개척한 산마루교회는 결국, 새 술을 담기 위한 새 부대였던 것.

“산마루교회는 일이나 봉사보다 자기 성찰과 영적 성장을 돕는 것이 최우선적 과제에요. 사람을 모아두는데 중점을 두지 않고 하루씩 완결하는 영성생활에 초점을 맞춥니다.” 양적성장에 무게를 두지 않았는데도, 세 가정에서 시작한 교회는 이제 이백 여명의 성도가 모이는 성장을 이루었다. 주일예배와 수요일 영성클래스 모임을 제외하고는 다른 프로그램은 없다. “재가 수도원적인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어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직업을 성직으로 여기고, 참된 마음과 진실한 영혼으로 머무는 삶이 필요해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돌파해야 해요. 멋있게 경쟁해서 얻고 얻은 것을 기꺼이 내놓는 삶, 생명을 감사히 먹고 나누는 삶, 힘을 갖되 남을 돌보는 데 쓰는 삶이어야 합니다.”


산이 다시 산이 되다 

돌아보니 그는 늘 떠남에서 시작하여, 돌아옴으로 다시 떠남을 시작하는 여정이었다. “이제 다시 개신교 영성이 무엇인지 더욱 확실히 깨달으며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한 때 답을 찾고자 가톨릭이나 정교회, 동양종교 전통에 대해서까지 돌아보았던 여정 끝에 다시 복음서와 로마서를 만나면서 종교개혁적 영성의 핵심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단다. 이처럼 떠났다가 다시 돌아간 신학교와 교회라는 자리, 그리고 더욱 곤고해진 개신교적 영성의 길은 산은 다시 산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되는 경험을 하게 했다.

그는 이제 막 자리를 제대로 찾은 듯하다.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처음 떠났던 그 자리로, 그러나 마치 또 처음 온 듯 설레는 여행자 같다. “산모퉁이를 돌면 절경이 곧 쏟아집니다. 삶이란 그런 거예요.” 찰나와 영원의 경계에서, 존재의 고유함으로 충만한 그는 이제 색다른 아름다운 꽃을 창조적으로 피어내며 또 다른 산을 오른다. 혼돈의 질문이 가득했던 삶은 명쾌한 답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함을, ‘지금 여기’를 살아가며 보여준다. 그러할 때 비로소 스스로 물음이 사라져 버리고, 묻지 않음으로 찾을 수 있는 더 깊은 힘의 여유를 갖게 되리라.


어쩌면 우리는 떠나는 것이 더 쉬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어쩌면 떠날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가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솔직한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방랑은 지금 어디쯤일까. 다시 떠나온 그 자리를 향해 돌아갈 수 있는 용기가 과연 언제쯤 생길 수 있을까.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영혼을 깨우는 외마디 노래가 되어 내 가슴을 수놓고 있다.

“가던 길을 계속 가세요. 더 깊은 산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