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시간이다. 몸의 긴장을 풀고 등을 세우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한 후, 침묵 가운데로 들어가 나의 거룩한 단어 ‘자비’를 떠올린다.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 감정이 나타나 침묵에 균열을 일으킬 때, 생각을 떠나보내고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간다. 최근, 이러한 ‘향심기도’를 하게 되면서 생각에 묻혀 있을 때보다 고요함 속에 머물 때, 오히려 얼마나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동안 해왔던 기도 방법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향심기도’는 내 영적인 여정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펼쳐져 있는 다양한 영적인 길에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의 길은 과연 무엇일까, 그 길을 또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 라는 고민을 해 본적이 있는가. 이 질문을 함께 나누고, 답을 찾아가는 일은 홀로가 아닌, 영적지도자의 동행과 안내가 필요한 과정이다. 미국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영성신학 ‘영적지도’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강학 목사, 그를 만나 지금 이 시대, 현대인들의 목마른 주제, ‘영성수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전공하신 ‘영적지도(spiritual direction)’란 개념은 무엇입니까? ‘영적지도’란 한 성숙한 기독교인(영적지도자/디렉터director)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기를 원하는 다른 기독교인(피지도자/디렉티directee)을 돕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라는 말때문에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함께 가는 영적 여정에서 옆에 있어주는 사람, 들어주는 사람, 한 발 앞서서 걷는 동반자이다. 영적지도자는 피지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바라본다. 기도의 저항을 느낄 때. 그 저항의 원인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함께 모색하고 식별한다.
영성수련의 기도는 대표적으로 ‘묵상’과 ‘관상’으로 구분되는데, 이 둘을 쉽게 소개해주신다면. 소리 내지 않고 하는 기도는 다시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으로 구분된다. 묵상은 적극적인 방법으로서 무언가를 읽고, 떠올리고, 분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데 비해, 관상은 수동적인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기도를 말한다. 한국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많이 하고 있는 Q.T.가 묵상에 속한다. 수도원적 전통 속에서는 ‘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나 ‘상상력을 이용한 기도’, ‘성찰기도’ 등을 ‘묵상’에 속하는 영성수련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예수기도’나‘ 향심기도’는 대표적인 관상에 속하는 기도이다.
‘상상력을 이용하는 기도’란 무엇입니까? 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상상력을 이용하여 그 장면을 떠올리며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의 오감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복음서 장면을 묵상하는 가운데 분석하면서 한 편의 영화로 연출하는 것과 같다. 등장인물 가운데 내가 어떤 입장에 서볼 것인지를 잘 설정하고, 예수님과 나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때 예수님은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예수님께 어떻게 대답하는 지를 보는 거다.
현대인들이 요즘 부쩍 ‘관상’에 속하는 향심기도에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특별히 가톨릭 쪽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보급하는 움직임입니다. 향심기도를 소개해주신다면. 향심기도란 ‘묵상’에 해당되는 과정 없이, 바로 직접 ‘관상’으로 들어가는 기도라 할 수 있으며, 가장 수동적인 방법이다. 우리의 생각, 느낌, 감정 등을 사용하지 않고 ‘거룩한 단어’를 정하여 그 단어에 집중하며 침묵하는 기도이다. 거룩한 단어란, 하나님께서 내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이다. 예수, 하나님, 평화, 사랑 등 자신의 거룩한 단어를 정하여 기도를 시작한 후 분심이 일어나면(생각, 느낌, 감정들이 올라올 때)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다시 돌아가고, 생각은 흘려보낸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에 저항하지도, 반응하지도, 붙잡고 있지 말라. 하루에 2번, 20분씩 꾸준히 하는 것이 좋다. 분심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거룩한 단어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 향심기도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기도이다. 거짓자아였던 내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참자아를 찾게 된다. 이는 우리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 있는 영적지도자의 안내를 받으며 하는 것이 좋다.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감정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향심기도가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향심기도가 마음과 생각을 비우는 ‘명상’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명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비움’의 기도라는 것은 유사하지만, 향심기도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근원으로 채워지는 기도라는 점에서 다르다.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채움’을 위한 ‘비움’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현존으로 채워지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성령의 활동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습니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서 그 소리가 내 욕망과 이기심의 소리일 수도 있을 텐데요. 만약 성령의 활동이라 ‘믿으면’ 된다고 할 때, 그 ‘믿음’이 맹신이나 주관적 해석과는 무엇이 다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영성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한 것을 식별하는 것이다. 그만큼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보통 ‘ 하나님의 뜻’을 식별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늘, 너무나 분명하다. 식별해야 하는 것은 ‘나의 뜻과 갈망’이다. 내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기준의 질문은 ‘기도의 진심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인가’이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인지, 우리 중심이신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뜨거운 갈망 때문인지 물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도란 무엇이다’라고 설명해주신다면.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이다. 바다를 누리려면 몸에 힘을 빼야 한다. 그러면 자유로워진다. 나의 주장, 의지, 집착을 버리고 힘을 뺄 때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다.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집착 때문에 지금 여기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거다. 영성이 깊어지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라는 명제는 영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더욱 깊게 한다. 그러나 영성이란 결국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임을 깨닫는다. 그분의 은혜의 빛이 없이는,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는 영혼 깊은 곳에 결코 이를 수 없기에, 영성의 길은 곧 ‘무기력의 재발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우리 안의 기쁨이 기뻐하고, 슬픔이 슬퍼하며, 감사가 감사드리도록 자신을 활짝 여는 것뿐이다. 존재의 힘을 뺀 온전한 무기력이 머무는 지점에서야, 중심으로부터 그분을 지향하는 기도가 기도하게 되리니. 글·사진 노영신
전공하신 ‘영적지도(spiritual direction)’란 개념은 무엇입니까? ‘영적지도’란 한 성숙한 기독교인(영적지도자/디렉터director)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기를 원하는 다른 기독교인(피지도자/디렉티directee)을 돕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라는 말때문에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함께 가는 영적 여정에서 옆에 있어주는 사람, 들어주는 사람, 한 발 앞서서 걷는 동반자이다. 영적지도자는 피지도자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바라본다. 기도의 저항을 느낄 때. 그 저항의 원인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함께 모색하고 식별한다.
영성수련의 기도는 대표적으로 ‘묵상’과 ‘관상’으로 구분되는데, 이 둘을 쉽게 소개해주신다면. 소리 내지 않고 하는 기도는 다시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으로 구분된다. 묵상은 적극적인 방법으로서 무언가를 읽고, 떠올리고, 분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데 비해, 관상은 수동적인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기도를 말한다. 한국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많이 하고 있는 Q.T.가 묵상에 속한다. 수도원적 전통 속에서는 ‘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나 ‘상상력을 이용한 기도’, ‘성찰기도’ 등을 ‘묵상’에 속하는 영성수련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예수기도’나‘ 향심기도’는 대표적인 관상에 속하는 기도이다.
‘상상력을 이용하는 기도’란 무엇입니까? 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상상력을 이용하여 그 장면을 떠올리며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의 오감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복음서 장면을 묵상하는 가운데 분석하면서 한 편의 영화로 연출하는 것과 같다. 등장인물 가운데 내가 어떤 입장에 서볼 것인지를 잘 설정하고, 예수님과 나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때 예수님은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예수님께 어떻게 대답하는 지를 보는 거다.
현대인들이 요즘 부쩍 ‘관상’에 속하는 향심기도에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특별히 가톨릭 쪽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보급하는 움직임입니다. 향심기도를 소개해주신다면. 향심기도란 ‘묵상’에 해당되는 과정 없이, 바로 직접 ‘관상’으로 들어가는 기도라 할 수 있으며, 가장 수동적인 방법이다. 우리의 생각, 느낌, 감정 등을 사용하지 않고 ‘거룩한 단어’를 정하여 그 단어에 집중하며 침묵하는 기도이다. 거룩한 단어란, 하나님께서 내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에 동의하는 지향의 상징이다. 예수, 하나님, 평화, 사랑 등 자신의 거룩한 단어를 정하여 기도를 시작한 후 분심이 일어나면(생각, 느낌, 감정들이 올라올 때)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다시 돌아가고, 생각은 흘려보낸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에 저항하지도, 반응하지도, 붙잡고 있지 말라. 하루에 2번, 20분씩 꾸준히 하는 것이 좋다. 분심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거룩한 단어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 향심기도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기도이다. 거짓자아였던 내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을 향함으로써, 참자아를 찾게 된다. 이는 우리 중심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 있는 영적지도자의 안내를 받으며 하는 것이 좋다.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감정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향심기도가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향심기도가 마음과 생각을 비우는 ‘명상’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명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비움’의 기도라는 것은 유사하지만, 향심기도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근원으로 채워지는 기도라는 점에서 다르다.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채움’을 위한 ‘비움’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현존으로 채워지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성령의 활동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습니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서 그 소리가 내 욕망과 이기심의 소리일 수도 있을 텐데요. 만약 성령의 활동이라 ‘믿으면’ 된다고 할 때, 그 ‘믿음’이 맹신이나 주관적 해석과는 무엇이 다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영성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한 것을 식별하는 것이다. 그만큼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보통 ‘ 하나님의 뜻’을 식별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늘, 너무나 분명하다. 식별해야 하는 것은 ‘나의 뜻과 갈망’이다. 내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기준의 질문은 ‘기도의 진심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인가’이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인지, 우리 중심이신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뜨거운 갈망 때문인지 물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도란 무엇이다’라고 설명해주신다면.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이다. 바다를 누리려면 몸에 힘을 빼야 한다. 그러면 자유로워진다. 나의 주장, 의지, 집착을 버리고 힘을 뺄 때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수영할 수 있다.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집착 때문에 지금 여기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거다. 영성이 깊어지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라는 명제는 영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더욱 깊게 한다. 그러나 영성이란 결국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임을 깨닫는다. 그분의 은혜의 빛이 없이는,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는 영혼 깊은 곳에 결코 이를 수 없기에, 영성의 길은 곧 ‘무기력의 재발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우리 안의 기쁨이 기뻐하고, 슬픔이 슬퍼하며, 감사가 감사드리도록 자신을 활짝 여는 것뿐이다. 존재의 힘을 뺀 온전한 무기력이 머무는 지점에서야, 중심으로부터 그분을 지향하는 기도가 기도하게 되리니. 글·사진 노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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