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기도’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신이라는 절대자 앞에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되는 때. 기도란 어쩌면 신앙의 제일 처음 행위이면서도, 결국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신앙을 가지면 가질수록, 무언가를 알아갈수록, 기도가 참 쉬우면서도 어려워진다. 우리는 지금 처음과 마지막, 그 어디쯤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걸까. 양평 모새골 산자락에서 기도의 새로운 지평을 삶으로 열어가고 있는 임영수 목사를 만나 우리 기도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모새골의 삶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무게와 비중은 어느 정도 일까요?
모새골은 공동체 전체가 잠자는 시간 빼놓고 늘 함께 기도한다고 할 수 있다. 하루 동안의 모든 생활이 기도이다. 모든 것이 기도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노동이 기도이고, 기도가 노동이기에, 노동을 하는 현장 자체가 기도가 된다. 그래서 기도는 하루의 삶, 그 자체이다.

하루 중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도하시는지요?
기도가 하루의 삶을 지배하지만, 그 중 일정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한다. 아침 5~7시에는 자유묵상을 한다. 이어서 정오의 묵상시간, 저녁의 집회시간 등을 통해 예배당과 세미나실 등에서 기도를 한다. 그런 일정한 시간을 갖는 것이 하루를 온전히 기도의 분위기 속에 잠겨 살도록 도와준다. 기도에는 언어가 있는 기도가 있고, 없는 기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가 있는 기도는 간구와 도고라 할 수 있고, 언어가 없는 기도를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새골의 기도는 언어가 없는, 묵상 기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매일 정해져 있는 모새골의 묵상 본문을 두서너 번 읽고 그 말씀을 음미하며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침묵 가운데 잠시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가운데 현존하여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찾아온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기도시간은 부족하다고들 합니다. 그래선지 내적인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시대, 기도는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며 ,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일정 시간을 갖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의 삶을 기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더 중요하다. 바쁘면 바쁠수록 잠시 멈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경험이 필요하다. 기도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배제하고서, 뚝 떼놓고 기도만 익히기는 힘들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어떤 자세로 어떤 대화를 하느냐이다. 기도의 내용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매우 진솔한 내용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피하고 싶었던 것, 얻고자 했던 욕망, 평생 깊이 숨겨져 있던 고통, 가책, 공포, 두려움, 열등감등 …. 모든 감정의 밑바닥에서 그 분을 만나라. 그것이 기도로 들어가는 가장 크고도 중요한 관문이다.

기도하고 싶지만, 기도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요.
멋스러운 문장으로 완성하려 하는
기도에서, 목이 쉬도록 기도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라. 그저 어린아이와 같이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천천히 아뢰는 자세가 필요하다. 수식어가 필요 없다. 문장의 완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를 받아주세요!”와 같은 신뢰의 언어가 필요하다.
비로소 그때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기도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각자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방향과 방법이 있을 텐데, ‘나에게 맞는 기도’란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요?
침묵기도, 향심기도, 관상기도, 통성기도 등 다양한 종류가 있
다. 그러나 기도의 방법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갖는 것이다. 그 분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신뢰. 기도는 사귐의 매개체이며, 하나님과의 신뢰를 쌓아가는 통로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 따내기 위한 기도의 차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들지 말자. 내가 얻고자 하는 이 일에 하나님을 끌어들이지 말자. 내가 그분께 마음을 열었다면 나의 의식이 작동하는 것을 멈추고 그 분의 이끄심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꼭두각시로 만들지 말라. 자기 내면의 깊은 것을 합리화하는 언어를 가지고 기도하는데, 그러지 말아라. 병의 결론을 자신이 내고 약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기도가 깊어지면 말이 없어진다. 자연스럽게 향심에서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처음부터 찾으려고 애쓰지 말아라. 모든 것은 과정이다. 기도는 나를 정죄하지 않도록, 나를 용납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먼저 지난날을 수용하는 나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를 알아가고 만나면서 대화에 지장이 안 되는 것,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들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다.

과연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응답을 알아 차릴 수 있을까요? 
참 재미있는 것은 어떤 문제
에 대한 기도가 깊어질수록, 원하는 것이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어느새 마음이 평안해지고 잠잠해진다. 하나님이 행한 것을, 사람들이 그렇게 행한 것을 수용할 수 있어진다. 그것이 응답, 아닐까. 예를 들어, 속 썩이는 고3 아들이 있다고 하자. 어머니는 무조건 대학에 입학시켜 달라, 자식이 속 썩이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도를 통해 아들을 조종하려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내 생각의 프로그램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응답하심을 신뢰하며 알아차려야 한다.



기도가 가장 위대하면서도 때로는 참 무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얼마전 용산에서 벌 어진 참극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사태를 전해 들으면서, 기도만 하고 있기에는 무언가 아프고 절망스럽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이슈와 기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요?
기도를 깊이 하다가 보면, 사회 문제에 대한 통찰력도 생긴다. 방송과 언론 등에서 문제를 포장하지만,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 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허구와 거짓, 집단적 조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이 입장, 저 입장을 선택하는 양자택일의 차원에서 벗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게 문제를 인식할 수 있다. 같은 구호라도 이데올로기화되고 의식화되어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위한 구호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정직하게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존재자와 행위자, 그 사이의 간극은 신앙인으로서 늘 느끼는 괴리일 것입니다. 때로는 행위하지 못하는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행위자로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설교 중에 ‘겉과 속이 거의 일치하는 경험’을 했다는 고백을 하셨는데, 이러한 간극의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요?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진정한 자기‘, real self’를 만나게 된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수많은 것들에 조종되고 있는‘ self’를 바르게 세워 가시는, 우리의 희망이시다. 우리는 그분과의 사귐을 통해 깨어나게 되고 진정한 자기, real self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기독교의 클라이맥스다. 그러나 self와 real self사이에는 괴리가 있게 마련이다. 기존의 제도권 안에서는 나의 이러한 깨어난 real self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참으로 고통스럽다. 이 간극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겉으로 쇼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알아둘 것은, 이러한 고통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책하지 말아라. 자꾸만 허세를 부리게 만드는 구조 때문이다.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진정성 있게 고민하고, 쉬운 것부터 해나가면서 내가 있는 그 자리를 변화시켜 가자. 그러한 현실 때문에 자신이 일그러지도록 내버려두지 말아라. 이제 우리의 영성에는 아트(art)가 필요하다. 테크닉이 아닌 아트! 곧‘ 지혜’가 있어야 한다. 나의 real self를 흔들어 놓는 현실의 구조에 오히려 필요한 것은‘ 사랑’ 아니겠나.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자. 사랑은 허다한 모든 것을 덮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눈높이 에 맞춰 설교해야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메시지와 청중, 그 사이의 괴리 또한 어떻게 극복 하시는지요?
모새골 형제자매들과 많이 가까워져서 지금 나의 설교는 이들에게 거의 모두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요즘엔 어떤 다른 신학교에서 설교하는 것보다 모새골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더 편하다. 내가 하고 싶은 수준대로, 해도 된다고 여긴다. 성도들을 지나치게 고려하는 것보다, 이미 깨달은 바를 꾸준히, 잘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스스로 흡수할 수 있도록 기다리면 좋겠다.

지금, 행복하시죠?
청소년의 때에 하나님을 이해한
것과, 노년이 되어 하나님을 이해한 것을 돌아보면 참으로 다르다. 열등감과 죄책감, 피상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던 청소년의 때에는 그것을 소화하지 못했다. 생 전체가 신앙의 딜레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앙의 삶은 그 해답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즈음, 이제야 그 해답을 찾아간다. 깨어남이 더 커진 것이다. 자연히 의문이 없어진다. 작년에 부딪혔던 문제가 올해에는 더 수월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난해를 헛산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어찌 늙어가는 것이 기쁘지 않겠는가. 만약 노년이 없었더라면, 그 방황 속에서 생의 깊은 면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싶다. 나는 그래서 노년이 참 좋구나, 한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도란’ 이런 것이다, 한문장으로 말씀하신다면. 
나에게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
이다. 내가 바뀌어 가는 하나님과의 무언의 대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과‘ 신앙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얼마 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을 떠올리며 종교를 초월하여 시대의 등불로서 살아갔던 한 어른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깨닫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나이를 사랑하고, 인생의 깊은 진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노년의 삶은 분명 복되다. 이 노년이 참 좋다는 그의 꽉 찬 고백은, 가장 일상적이고도 가장 성스러운‘ 기도’로 귀결된 영적 여정을 오롯이 드러낸다. 우리에게, 이러한 어른이 있다.


글ㆍ사진 노영신


임영수 목사가 추천하는 책
신뢰 Ruthless trust| 브레넌 매닝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다 아슬아슬하고 무섭고 풍부한 신뢰의 경험으로 부른다. 저자가 느꼈던 고통과 기쁨, 환희와 비극을 통해 배운 밑바닥 신뢰가 담긴 책.

Posted by 문화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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