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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ITY/두 손을 모으다

영성이란 인간이 행복해지자는 일 l 장로회신학대학교 유해룡 교수


교회를 다니지만, 신앙은 자라지 않는다던가,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으로 고민에 빠진 이들이 이제는 주위에 꽤 많이 생겼다. 교회를 옮겨야 할지, 옮긴다면 또 어떤 교회를 가야 할지, 새로운 교회에서는 과연 이 갈등이 해결될 수 있을지, 끊이지 않는 질문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지금 이런 고뇌를 그대로 안고 현재 교회를 의미 없이 다니는 것은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이들, 즉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시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교회 찾기는 그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 길어 올리는영성적 만족은 더 중요하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이하 장신대)에서‘ 영성’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회자시키며‘, 기도’의 영적 여정을 지도하는 유해룡 교수를 만나 우리 시대의 영성적 고민과 부딪힘의 속내를 물어본다.

기 도 는 수 단 이 아 닌 , 목 적 이 다
먼저 영적인 여정을 걸어가신 선배나 영성가들의 기도와 생활이 궁금한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에서‘ 모델’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며, 그래서 막막한 답답함이 더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 기도를 가르치시는 교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실까 싶은데요.
기도가 ‘형식적인 의미’에서 ‘본질적인 의미’로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볼 때에, 기도를 몇 시간 했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나, 본질적으로 더 들어가면 또 의미가 없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해야 하는 일, 과제로써 여긴다. 그렇게만 달려가면 기도가 ‘수단’화될 수밖에 없다. 기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필요해서 하는 게 아니란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의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기도하도록’ 우리를 지으셨다. 그렇게 본다면 나의 삶 전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의식적 행위가 기도 아닐까. 그리고 기도는 그 하루를 처음 출발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기도를 언제 하는 것이 좋냐 묻는다면, 나는 새벽 혹은 아침에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요즘 현대인들이 그렇게 바쁜데, 새벽 아니면 언제 시간을 낼 수 있겠나.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겠지만 새벽에 하기를 권한다. 그것 또한 하나의 훈련일 수 있다. 나도 아침형 인간은 아닌데 서서히 바꿔 가는 거다.

그렇게 새벽에 기도하실 때 교수님만의 방법이 있다면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기도는 ‘목적’이다.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을 위한 것이다. 내 욕구가 무시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것이 늘 앞장서서도 안 된다. 내 욕구가 동기가 되어서도, 내 욕구에만 충실해서도 안 된다. 나는 기도할 때 성경말씀을 통해서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내가 응답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분은 말씀을 통해 내게 요구도 하시고, 명령도 하시고, 그대로 머물기를 원하시기도 한다. 나는 그대로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과정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까요?
먼저 성서 속에서 말씀하시는 내용들을 일단, 관대하게 받아들여라. 그리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살펴라. 갈등과 고민, 두려움, 불안 등을 잘 살피고 그것을 분별해라. 또한 나눌 수 있는 그룹이 있다면 공개하라. 공개했을 때 거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영적식별의 규범은 ‘드러남’이다. 숨김이 있을 수 없다. 공개는 이를 객관화하는 과정으로 저절로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영적 지도자로부터 지도를 받아라. 하나님의 음성은 대부분 원론적이고 원칙적이다. 집 팔아서 반은 어떻게, 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그 물질에 대한 나눔, 초월적 마음을 주실 거다.

영 성 훈 련 , 교 회 가 가 르 치 고 나 누 어 야
기도는 예민한 영적 감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 속에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는 신앙인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정작 부족한 것 같습니다. 회개와 감사, 그리고 간구로 이루어진 전형적이고도 획일적인 기도 형태만이 노출되어 있는데요. 장신대에서 현재 교수님께서 진행하고 계신 영성훈련(장신대 신대원 학생을 위한 경건 훈련. 은성수도원에서 2박 3일동안 침묵으로 기도한다. 하루에 5번씩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지도교수와 기도 내용을 나누고 지도를 받는다.)을 통해 학생들이 기도를 배우며 깨달아가듯,교회에서도 평신도들과 이러한 과정을 공유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분명히 교회에서도 이러한 영성훈련과 기도훈련 등의 가르침과 배움이 이뤄져야 한다. 사실 교회에서 기도에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매뉴얼을 나에게 요구할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영성훈련은 프로그램이나 매뉴얼 같은 것으로 규격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절을 하면 지금 학교에서 뭐 하고 있지 않느냐, 묻는다. 그럼 뭐 하기는 한다고, 대답한다. 근데 왜 안 되냐는 거다. 물론 어떻게 하는 지를 말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교회에서 제대로 구현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성훈련을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가 이미 충분한 기도의 훈련과 성숙의 여정을 지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적 지도자를 길러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교회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영역의 소리를 못 들은 체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참으로 안타깝다. 솔직히 딜레마다.


기도란, 춤이다. 그분과의 춤. 나
미숙한 춤꾼이요, 성숙한 춤꾼
이신
그분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서 춤을
추는 것이다. 내가 조정하
려 들지
않고, 그분의 의도와 이끄
심을
따라 내가 움직이는 것, 그것

기도다.




교회가 먼저 그 필요를 느끼기도 하지만, 도통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교회 구조 속에 있는 성도들이 그 갈증을 더 느낄 때에는 내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는데요.
우선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과소평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영적인 욕구는 매우 깊다. 관심이 열망을 만들고 발견을 이룬다. 영적 지도자의 양성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다. 스스로 정직한 사람이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요즘교회가 많이 왜곡되어 있다고 비판하는데, 그 왜곡조차도 잘해보자고 하다 된 결과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완전히 뒤바꿀 수
는 없는 일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하고,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를 기대하면서 가면 또 그 중에 개혁자가 나오는 법이다. 또한 각자가 내적으로 성숙해지면 제도나 구조의 울타리가 있어도 답답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바울의 고백이 그와 같다. 즉, 구조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성숙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생각한다. 개인이 성숙하면 그 구조의 상당 부분은 고칠 수 있고, 또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상하지 않을 수 있다. 현실에 그저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라는 거다. 갈등은 어디나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장신대는 목회자 양성기관인데, 교회 현장을 고려하여 학생들이 원하는 능숙한 기능인을 양성할 것인가, 목회자로서 성숙한 존재를 형성하도록 양성할 것이냐의 문제는 나에게도 역시 현실적인 갈등을 일으킨다.

자 기 몰 입 에 서 해 방 될 때 찾 아 오 는 행 복
21세기가 영성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교수님이 정의하시는 영성이란 무엇인가요?

영성은 ‘인간’ 이해에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 영성이라는 말은 없고, 예수님 영성이라는 말은 있지 않은가. 그때의 예수는 인간예수를 의미한다. 우리 영성의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또한, 영성은 ‘행복하자는 일’이다. 행복의 실현을 위한 능력, 즉 ‘행복추구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더욱 나은 이상을 추구하는 추진력이며 자기 초월적 능력을 말한다. 이는 파문과 같아
서, 마침내 자기를 초월하여 나와 너와 이웃과 세계를 향해 가는 능력을 말한다. 내가 단독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실현하는 존재이며 그것이 행복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몰입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나를 따라오라 하셨다. 자기를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복 받겠다고 신앙 갖는 것은 자기몰두이다.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쑤셔 집어넣는 것으로부터 떠나라. 자기를 떠나 예수님을 따를 때의 그 무한한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영성은 또한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적인 삶으로의 부름을 의미하기에 그 부름에 순응하고 온전해지는 다른 종교적 삶도 영성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교인들에게도 그들의 영성이 있는 것이다. 제발, 사탄의자식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라. 그들은 사랑하고 대화하며 존중해야 할 대상이다.

때로는 몸이 먼저 우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몸에 나타나는 질병이나 변화를 보며 스트레스 상태임을 확인할 때도 있고요. 몸을 마음이나 영에 비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전통적 영성에 비해 요즘에는 몸의 중요성과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전인적으로 성숙해지는 영성을 추구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은 기도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몸이 아프다는 것은 영적 침체의 징후이기도 하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몸과 마음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몸의 리듬에 맞춰 몸이 원하는 것을 먼저 해주라고 말한다. 육이 연약하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영적인 문제로 귀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몸이 아픈데, 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영적인 문제로만 파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직한 몸의 요구에 응답하라. 그 다음에 정신적인, 마음의 문제를 풀어라.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그 관계가 왜 안 풀리는지 기도해라.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의 문제를 풀면 관계의 문제도 대부분 풀린다. 문제를 풀어가는 순서는 육체적인 문제-정신적인 문제-영적인 문제 순이다. 정신적인 문제는 상담적인 차원에서 도움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육체적인 문제가 여전히 존재해도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 때가 온다. 마치 바울이 육체의 연약한 가시를 가졌다고 고백한 것과 같다. curing(병의 치료)은 되지 않아도 healing(치유)은 되는 거다.


기도 체험과 영적 지도 유해룡|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유해룡 교수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대학원생 등을 대상으로
영적 지도를 하
면서 쌓아온 기도 체험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
갱신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과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의미, 다양한
기도
경험, 관상기도, 반추와 식별, 기도의 실제 등 진보된 기도
생활을 하는 데 실질
적인 도움이 되는 영적 지도서의 역할을 한다.



기 도 란 춤 이 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도란 이런 것이다, 맺어주신다면.

기도란, 춤이다. 그분과의 춤. 나는 미숙한 춤꾼이요, 성숙한 춤꾼이신 그분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서 춤을 추는 것이다. 내가 조정하려 들지 않고, 그분의 의도와 이끄심을 따라 내가 움직이는 것, 그것이 기도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하여 알도록 해라’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이 명제를 안셀름 그륀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라 표현했다. 내가 처한 이 구체적인 현장을 알고, 나의 생각과 느낌, 나의 고통과 질병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내 가능성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오히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안개 속을 걷고있는 듯한 불안한 삶의 위태함 속에서 위로부터, 교회로부터, 누군가로부터 여기가 어디라고 구분해주는 분명한 계시를 바라지만, 이 또한 익숙해진 관성과 습관에 지나지 않은 욕심인지도 모른다. 영성이, 인간이 행복해지자는 일이라고 할 때에 이 여정은 매 순간 지속적으로 평생 걸어야 할 과정이라는 사실은 다시 자명해졌다. 흐드러지게 봄을 속삭이는 꽃은 그 곳에 충실히있어 존재의 희열을 노래한다. 다시 묻는다. 지금 여기, 나는 행복한가. 글ㆍ사진 노영신

 
유해룡 교수가 추천하는 책 _ 기도
필립 얀시|청림출판
상처 입은 영혼의 대변인이자 특출한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가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파헤친다. 순례자의 관점으로 기도에 관한 우리의 고민을 점검하고 탐색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우정의 삶을 기도가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