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은 <예수전>이라는 책에서 내 안의 적과 싸우는 것을 ‘영성’이라 하고, 내밖의 적과 싸우는 것을 ‘혁명’이라 할 때에,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본래적 의도에는 동감하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성’을 그렇게만 정의하고 시작할 수 없다는 거다. 우리가 ‘영성’을 추구하면서 종종 받는 오해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내면에만 온통 집중하여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고, 함께 무언가 하기를 거부한다는 등의 평가였다. 김규항 또한 그런 이해 속에서 저 명제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이분법적 도식이 ‘영성’ 자체를 왜곡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말하고 있는 ‘혁명’ 또한 이미, ‘영성’의 범주 안에서 다뤄져야 하는 영역 아닌가. 영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면이 성숙해지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순과 아픔에 함께 참여하게 되고, 또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영성의 시대를 살면서도 ‘영성’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이 팽개쳐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교회 현장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시대의 고통에 예민하게 아파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듯하나, 날카로운 쓴 소리를 힘 있게 선포하는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그래서였다. 푸르러서 더 슬픈 5월의 끝자락, 그를 만나고 싶었던 건. 글ㆍ사진 노영신
요즘 어떠신지요. 국민장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 때,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너무 슬프다. 이 시대가 너무 슬프다. 몸을 가진 실존의 슬픔이다. 그러나 이 슬픔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슬퍼야 하나 될 수 있다. 울어야 웃을 수 있듯이. 이 거대한 추모 물결이 가능한 것은 노무현 개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퍽퍽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목말라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봉하 마을에 다녀왔다. 그렇게도 길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서, 슬픔이 이 행렬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도록 각성시키는구나, 깨달았다. 막 달려왔는데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살아왔다는 자각과 성찰이 뒤따르는 것 같다. 그런 것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를 울게 한다.
설교를 통해 이러한 사회적 이슈나 사건에 대하여 종종 나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깊은 관심사를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목회자의 직무다. 어제 용산 참사가 일어났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어찌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가. 어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살을 했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어찌 안할 수 있는가. 단지 한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것, 이 은유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로서 당연히 고민하고 나눠야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교회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먼저 위로해야 한다. 분석은 나중에 한다. 위로 없이 먼저 행해지는 해석은 잔인한 것이다. 슬퍼하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했다. 그건 해석하라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함께 있어줌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나. 당신이 당하고 있는 불행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해석하려 드는 것은 참으로 오만한 태도다. 무엇이든지 설명하려고 하는 우리의 한계이며 버릇인 것 같다. 우리는 그걸 다 모른다. 설명하려고 하지 말자. 성서의 영감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을 조심스럽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 온전히 서지 못할 때, 아니 그저 서 있기만 하는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뿐이라고 여겨지면서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성서의 메시지가 있는데 그 때의 땅 끝이란, 삶의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겨우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들이야말로 좋은 소식, 곧 복음이 필요한 자들 아니겠는가. 교회 안에서도 때때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이를 세상 불편하게 만드는 소리로 거슬려 하기도 한다. 그 소리의 본질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도 분노할 줄 모르는 기독교는 살아있다 말할 수 없다. 성서의 하나님은 히브리의 하나님이다. 히브리는 사회 밑바닥 계층,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상징한다. 우리 하나님은 그들이 살 권리를 찾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린 이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않을 때 왜곡의 차원이 아닌, 잔인한 차원의 교회가 될 수 있다. 그 때 영성은 사기 아닐까.
일상생활에서 기도는 어떻게 하시는지.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는 시간이므로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농부이신 아는 분이 그러더라. 자기는 땅에서 호미로 풀을 베고 땅을 만질 때, 그 때가 가장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 같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은 자기 비움의 시간이고, 고요함 가운데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하루에 2번 정도 관상기도를 한다. 또한 걷는 것을 좋아해서 홀로 걸으며 기도하게 된다. 그리로 매일 ‘몸기도’를 한다. 내 머리부터 시작해서 눈, 코, 입, 귀, 가슴, 팔, 다리, 손, 발 등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영혼의 샤워를 한다. ‘오늘 내 머리로 하는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게 하시고, 오늘 내 눈으로 보는 것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시고, …오늘 만나는 사람과 악수를 하는 내 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게 하시고…’와 같이 내 몸의 하나하나를 의식하면서 치유하고 화해한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 이를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가르쳐서 이 기도를 하는 이들도 있다.
기도를 하면 성령 충만해진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기도 하고요. ‘성령 충만’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성령은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지혜로, 용서로, 깨달음으로, 때로는 하나님의 것이 훼손되었을 때의 분노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다양한 형태의 바탕에 자리하는 것은 ‘공감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공감의 능력이 크고 폭이 넓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물론이고, 자연과, 동물과, 식물과, 심지어는 물건과 공감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공감이란 한 몸으로 의식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은 그 피조물과 사실은 한 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사로 잡혀 있으면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특별한 방법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건전한 이성과 상식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만약 선택을 해야하는 기로에 있다면, 대개 나에게 손해나는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 내가 손해를 봐도 괜찮다는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부분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알아야 사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거다. 그러니까 괴로워서 또 기도하는 것 아닌가! 떼제 공동체의 로제 수사는 contemplation(관상)과 struggle(노력.투쟁.행위)이 조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님도 기도(관상)와 치유(행위)를 동시에 하신 분이다. 기도한 만큼 살아가야 한다. 근데 우리는 기도만 한다. 그렇다고 기도와 관상 없이 투쟁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예를 들면, 평화운동가가 자신의 내면에서 평화를 이루지도 못하면서 평화운동을 하는 경우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수님도 기도(관상)와 치유(행위)를 동시에 하신 분이다. 기도한 만큼 살아가야 한다. 근데 우리는 기도만 한다. 그렇 다고 기도와 관상 없이 투쟁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전통적인 교회이지만 다른 교회와는 또 다른 점이 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딪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함께 공존하는 분위기이다. 전임목사님의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거다’라는 가르침이 잘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교회는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늘 말하지만, 예수 믿으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성도들의 목표는 ‘세상의 선물로 사는 사람’이다. 크게 평화와 생명,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 언어, 소비, 관계 등에서 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의 시대’가 아니라 ‘죽임의 시대’에 먼저 선물과 같은 사람으로 살면 좋겠다. 요즘 전도와 부흥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만약 성서의 말씀대로 교회 목회를 해 나간다면 교회가 갑작스럽게 확, 불어날 수가 없다고 본다. 예수님이 가셨던 길은 좁은 길이었고, 쉬운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전도와 선교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도 길거리에서 전도해보기도했지만, 그건 효과가 없더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가시화시킨 것이 우리이다.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너를 보니,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진정한 전도 아닐까.
요즘에 ‘위기’라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교회에서는 요즘 위기가 곧 기회라고, 잘 극복하면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또 그런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고요.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그대로 전제하고 시작하는 극복은 문제가 있다. 그때 희망은 위험한 희망이다. 사람의 만족지수는 ‘capital(자본)÷need(욕구)’로 계산된다. 만족이 높아지려면 capital이 많거나, need가 적으면 된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 capital을 증가시키려 하지만, 예수가 보여준 만족스러운 삶은 need가 적은 쪽을 택하는 것이었
다. 그런데 교회가 이걸 반대로 부추긴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받아서 capital을 많이 소유할 수 있을 것처럼 오도한다. 모두 need를 줄일 생각은 하지 않고, 아직도 더 많은 capital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에서 사는 사람들을 향해 알을 깨고 나와 살도록 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난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해’라는 고백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capital의 증가를 위해 분주하게 살아가는 삶은 본질을 곧 잊게 만든다. ‘바쁠 망(忙)’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心이 밑으로 가게 되면 ‘잊을 망(忘)’이 되는 것이다.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망각했다. 공공적 이성보다는 벌거벗은 욕망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나팔을 불어야 한다. 기독교가 따뜻하고 안락한 삶에 투항하는 순간, 복음의 정신은 죽게 마련이다.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넘어진 지점이 어디일까요.
한국교회의 외적 성취와 내적 진실함의 증거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 성찰과 반성이 있다는 거다. 반성이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와 타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깨닫게 되는거다. 즉, 반성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길 때 가능한 것이다.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적으로 대하는 태도에서는 성찰이 일어날 수 없다. 신앙에 대한 회의가 많아지고, 교회 성장이 정체된다는 것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데, 한국교회는 이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성찰적 주체자로서의 신자가 없다는 거다. 그러니 교회가 점점 사회로부터 반지성적인 집단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신령한 부흥사라고 알려진 사람이 식당에 가서 종업원을 “야! 이리 와 봐!”하고 부른다면, 그의 영성은 위선이고 가식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그러한 껍질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뼈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그 반성이 없이는 교회에서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니고 싶은 교회를 찾지 못해 서성이는 ‘신앙적 난민’을 계속 양산할 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 길로 가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도란 이런 것이다, 맺어주신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맺음이다. 예수가 아바아버지라 불렀던 만큼의 깊이 있는 친밀성으로의 초대를 말한다. 영성이란, 자아가 영(0)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과정을 지나 자아가 줄어드는, 자기를 비워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마친 후, 교회 앞마당까지 배웅하러 나온 그가 문득 “감나무꽃 본 적 있으세요?”하며 화단에 심겨 있는 작은 나무 하나를 가리킨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감나무꽃은 아래를 향해 조그마한 하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잘 피지도 않고, 또 금방 지기 때문에 보기가 어렵다는 이 감나무꽃을 만난 날, 나는 이 시대 한국교회에서 참 보기 어려운 ‘진정한 영성가로서의 목회자’를
발견했다. 그는 사회운동가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투사도 아니요, 늘 기도만 하는 도인도, 이래라 저래라 말만 하는 종교지도자도 아니었다. 늘 고통 받고 배척당하는 사람들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예수처럼, 시대의 아픔이 절절히 흐르는 낮은 곳에 몸과 마음을 두고, 본질적 ‘사람’을 위로하고, 비본질적 ‘욕망’을 꾸짖을 줄 아는 이였다. 마치 겸손히 ‘땅’을 향해 피어 있던 그 감나무꽃 마냥.
김기석 목사가 추천하는 책 _ 희망을 심다
박원순|알마
그는 신앙적인 도서보다는 오히려 일반서적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인문학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바깥의 소리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기독교인보다 더 기독교적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혁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누고 싶다며.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변호사가 펴낸 유언장 같은 이 책은 내가 사는 시대, 다른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떻게 그런 삶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며 박원순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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