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노래는 세계 최초의 개신교 수도회이자 초교파 수도 공동체인 프랑스 ‘떼제’의 찬양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찬양을 통해 떼제를 접하기는 했지만, 떼제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열정적으로 부흥해왔던 한국 개신교 분위기와는 달리, 유독 한국에서는 떼제가 잘 소개 되지 않았다. 개신교로부터 출발한 떼제이지만, 가톨릭의 한 부분이라는 오해도 한 몫 한 것 같다. 전 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의 영적 순례지가 되고 있는 떼제 공동체는 과연 어떤 곳일까. 프랑스 떼제의 한국인 수사인 신한열 수사가 서울을 방문하여 떼제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과 모임을 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즈음, 이곳에서나마 떼제를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신한열 수사와 함께 하는 떼제 모임이 지난 12월 5일 동숭교회에서 열렸다.
떼제 찬양을 배우는 중이다. 묵상기도회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에서는 떼제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입니다. 떼제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해주신다면.
떼제는 종신서약을 하고 봉헌생활을 하는 형제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이들을 수사라고 하는데, 이는 직제가 아니라, 이곳에서 평생 신앙의 길을 걷고자 약속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 세계 걸쳐 100여 명 정도의 수사가 있고, 그 중 70여 명이 프랑스 떼제 본부에 있다. 나머지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떼제의 모든 수사들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며 자신을 위해 어떤 기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해서 번 것만으로 살아간다. 또한 개인적으로 상속 받은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로 돌린다. 당시 전쟁 중이었던 1940년, 로제 수사가 떼제라는 지역에서 화해와 용서, 평화를 위해 기도생활을 하면서 자리를 잡았고, 이에 함께 삶을 헌신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게 되면서 이것이 떼제 공동체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종파와 교파를 초월하여 떼제를 방문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떼제에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이들은 노래와 침묵, 기도와 노동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경험하고, 마음의 평화와 삶의 목적을 재발견하게 된다.
떼제가 한국에서는 가톨릭과 가까운 듯 여기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떼제의 종교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떼제는 실제로 개신교 출신의 형제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 로잔 수사는 ‘내가 받은 신앙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가톨릭 신앙의 신비와 화해한다’라고 정리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개신교냐, 가톨릭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그리스도교이며, 그 성격이 에큐메니칼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전 8시 15분, 오후 12시 20분, 저녁 8시 30분 이렇게 하루에 세 번 공동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 외 시간에 수사들은 성경연구모임을 준비하고 이끌며, 방문자들을 만나고, 수사로 지원하는 젊은이를 지도하기도 하고,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의 모임
의 핵심이다. 이 시간은 순례자들이 그분 앞에 그저 ‘존재’할 수 있도록 한다. 무엇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인 것이다.
떼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떼제의 정신이라고나 할까요?
떼제의 정신은 따로 없다. 무엇 무엇이 떼제의 정신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떼제의 정신이 아닐 수 있다. 떼제를 본받고 따르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떼제의 하루 일과와 프로그램 등을 문의한다. 그러나 떼제는 무슨 정신도 아니고, 무슨 프로그램도 아니다. 20대에서 9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와 각기 다른 국적의 수사들이 함께 모여 온 삶을 바쳐 ‘살아가는’ 공동체일 뿐이다. 단순소박한 삶, 믿고 의탁하는 신뢰, 마음의 기쁨, 자비, 용서 등이 드러나는 삶, 우리에겐이 ‘삶’이 있다. 시편 133편 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그토록 전 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떼제를 찾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떼제는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시대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청년들이다. 기득권이 되지 못하고 발언권이 없는 세대, 다툼과 분열이 많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이들이 바로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늘 이들을 교회의 미래라고 하는데, 왜 교회의 미래냐? 교회의 현재지! 지금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17세에서 29세까지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맞이하는데, 이 젊은이들, 즉 순수한 이들은 전쟁, 교회의 분열 같은 세상의 다툼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게 낙심과 절망으로 얼룩진 젊은 인생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며, 그들을 사랑으로 존중하는 것, 이것이 떼제가 하는 일이다. 떼제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에 감격하고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더 나아가 신앙의 원천을 찾아가게 된다. 떼제의 모든 사람들은 함께 노동을 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단순소박한 공동체의 삶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놀란다. 이 공동체 자체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비유’가 되는 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일치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후 다시 각자의 교회로 돌아가서 더욱 자신답게 살아가며, 교회를 세우는 지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며 엄격하게 보이는 떼제가 도리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떼제의 본질, 평생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은 시대에 맞게 변한다. 중요하게 지향하는 것은 엄격하게 지키지만, 변화와 개조는 떼제의 기풍에 속할 정도로 유연하다. 젊은이들이 언제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떼제가 그들에게 있어 제2의 고향 같은 곳이길 바란다. 편안한 할머니집 같은 거 말이다. 언제고 찾아왔을 때, 변하지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있어주는 것에 고마워한다. 현대사회가 너무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본질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와, 동시에 시대에 맞게 변형시키고 가공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
유럽교회가 쇠락하는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은 텅텅 비었거나, 나이트클럽으로 운영되기도한답니다. 한국교회 또한 이제 곧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거라는 어두운 전망도 들립니다. 실제 유럽에서 지내시면서 느끼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청년들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가르치려한다거나, 훈육하지 않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 알아도 할 수 있는 힘이 아예 없을 때가 있지 않나. 그땐 함께 있어주는 친구가 필요한 거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육적으로 대하면 상대는 이중적이 되거나 죄책감에 짓눌리게 된다. 유럽교회는 사랑의 하나님보다는 이러한 정죄의 하나님, 정죄의 신학을 강조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양심이라는 밧줄로 우리를 묶어 이끄시는 분이 아니시다. 유럽교회가 쇠퇴하는 요즘, 교회를 나가는 소수의 젊은이들은 대단한 결단을 한 거라 볼 수 있다. 즉 쇠락하는 유럽교회는 한편으론, 그동안 교회를 관습적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빠지고, 오히려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만 남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신앙으로 살아가느냐이다. 교회의 쇠락을 숫자로만 평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적더라도, 본질을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다면, 교회는 희망이 있다. 본디 빛과 소금은 조금이면 되는 것 아닐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이들을 맞이하는 것 또한 하나의 큰 일이 되었을 텐데, 본질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지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흔히 하게 되는 실수일 수 있는데요.
수사들은 무엇보다도 개인 기도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과 더불어 혼자있는 시간이다.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속담처럼, 바쁠수록 오히려 기도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일이 쌓였더라도, 돌아가면서 개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 기도 시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기도는 생명처럼 살기 위해 한다. 본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건 노력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가장 당연한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영혼의 친구, 멘토가 있다. 나에게는 16년 째 나와 함께 대화하는 할아버지 수사님이 계시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이메일로, 전화로,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다.
매일매일 화해를 구체적으로 이루어가기를 바랬던 로잔 수사의 바람처럼, 떼제는 지역과 나이의 구분을 떠나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서, 한 하나님을, 한 목소리로 찬양하며 그분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떼제를 다녀와야만 그런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떼제 수사들과 똑같이 살아야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떼제 공동체 또한 떼제를 다녀간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 강조한다. 결국 그분의 현존에 늘 깨어 있어 일상을 살고자 하는 내적열망의 문제이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빠져나가는 시대에도, 떼제는 그런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으며, 지금도 세계 곳곳 순례의 영혼들을 부르고 있다. 글·사진 노영신
작은 방을 울리는 천상의 하모니
떼제를 가보고 싶으나, 프랑스는 너무 멀다 싶으면 화곡동에 자리한 서울 떼제 공동체를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묵상기도모임이 열린다. 삐그덕거리는 낡은 계단을 올라가면 20명이 앉기에도 빠듯할 만큼 자그마한 예배공간이 하늘거리는 촛불과 함께 사람들을 맞는다. 소박하지만 이내 분주했던 마음을 매만져주듯, 따스한 그분의 현존이 가득하다.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이어서 따라 부르기 좋은 떼제 찬양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고, 찬양이 더해질수록 멜로디와 리듬, 박자와 가사 등을 넘어서 더욱 깊은 곳으로 이끌림을 받는다. 성서 말씀을 돌아가며 봉독하고 침묵으로 기도하는 시간, 모두가 함께 연결되어 그분을 만나는 황홀한 경험이 이어진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이곳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수사들도 만날 수 있다.
서울 떼제 공동체| 서울 강서구 화곡동 105-51 02-2606-7079 www.taize.fr/ko
전쟁의 폐허 위에 탄생해, 전 세계 수백만 젊은이들의 영적 순례지가 된 ‘떼제’. 프랑스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떼제를 찾은 제이슨 브라이언 산토스가 전하는 희망의 이야기이다. 신성한 일상과 영혼에 이끌려 떼제를 찾은 젊은 순례자들의 여행담을 다루고 있으며, 떼제 공동체의 정신과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떼제의 실용적인 면과 내적인 실체 모두를 신중하고 아름답게 설명하면서 떼제에 대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다양한 젊은이들의 순례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신뢰와 화해를 그려내고 있다. 떼제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 모두 함께 담겨져 있다. 떼제로 가는 길
'SPIRITUALITY > 두 손을 모으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처럼 l 동교동교회 음동성 목사 (1) | 2010.08.19 |
---|---|
온 몸으로 하나님을 즐기는 영적 감동 ㅣ 삼무곡자연예술학교의 김종률 목사 (0) | 2010.06.23 |
기도가 기도하도록 하라 ㅣ 영적지도자 이강학 목사 (0) | 2009.12.31 |
고통의 순간 피어나는 부활의 꽃 l 들꽃교회 이진영 목사 (1) | 2009.10.21 |
시대의 아픔을 껴안는 영성 l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1) | 2009.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