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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8 03-04 다문화, 행복한 공존을 꿈꾸다

다문화, 행복한 공존의 꿈꾸다 1 | 단문화사회에서 다문화사회로

 

한쪽에서는 잔치, 한쪽에서는 강제추방인 설날 풍경

이번 설에도 어김없이 ‘외국인근로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설날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하여 설 음식을 맛보았고, 동네 어른께 세배한 후, 자기 나라의 전통 춤과 음악을 한국에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인과 ‘외국인근로자’가 웃으며 새해를 맞이하던 기쁘고 즐거운 설 연휴에, 서울 홍대의 한 골목에서는 이런 즐거운 날에 어울리지 않게 강제 추방된 이주노동자를 위한 벼룩시장이 열렸다. 지난 해 8월부터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강제 추방되었는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벼룩시장이란다. 어떤 이는 이주노동자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고, 어떤 이는 외국인보호소에서 병을 얻고도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강제로 출국 당했다.  


다문화·다인종 사회,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조금 과장을 하자면 이제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 한국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이주민 자녀들이 엄연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들어왔고, 이제는 ‘외국인 100만 명 시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80년대 초반까지 한국이 노동력 수출국이었다면, 80년대 후반부터는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에 힘입어 노동력 수입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100만 명의 외국인 중 장기체류자는 70만 명, 이중 40만 명이 이주노동자이고, 10만 명이 결혼이민자들이다. 그리고 40만 명의 이주노동자 중에 절반이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불법체류자’들이야 말로 한국어도 능숙하고 김치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절반은 한국인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라는 것.

한국 정부의 이주민 정책이 어떻든 간에, 한국으로 향한 이주의 물결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게다가 국제적 이주노동의 흐름이 아시아에서 서구의 선진국으로 향할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아시아에서 다른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으로의 흐름이 훨씬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아시아가 제일 큰 이주노동의 유통지역이고, 그 다음이 유럽이며 세 번째가 북아메리카이다. 세계적인 추세도 물론이며 국내의 상황도 지켜보면, 이제 한국을 단일민족국가라고 언제까지나 고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양한 다문화주의‘들’

다문화주의는 이름답게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 다문화사회란 인종의 구성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그에 수반한 다양한 문화적 가치관, 사회를 조직하는 서로 다른 방식까지도 인정해야 하는 사회이다. 즉, 다양한 생각과 문화가 충돌하지 않게끔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다문화주의를 표방한 나라들은 저마다 다른 역사적 배경과 사회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다문화주의라고 해도 그 내용들은 모두 다를 수 있다. 마르티니엘로(2002)는 다문화주의를 세 가지로 구분지어 소개한다. 첫째, 이주민의 음식·전통의상·축제 등 문화의 교류를 뜻하는 온건한 다문화주의, 그 다음이 이주민과 관련된 정책과 제도를 보완하는 정도에서의 정책적 다문화주의, 마지막으로 사회전체의 사고방식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서 강경한 다문화주의가 그것이다. 즉, 다문화주의는 소박하게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법적·제도적 변화뿐만 아니라, 이주민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태도에도 관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문화주의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폐쇄적인 다문화주의에서부터 열린 다문화주의까지 그 진동의 폭이 넓다. 그래서 그냥 다문화주의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다문화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오경석, <한국에서 다문화주의-현실과 쟁점>).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 다문화주의와 민족주의

한국에서 다문화란 참 쉽지 않다. 다문화 사회는 이제 막을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고, 이에 대처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문화라는 개념이 만들어질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 스스로는 타문화에 개방적이고 민족주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나는 외국인들마다 ‘한국인들은 민족주의가 강하고 배타적이라서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는 얘기를 한다.

그럼 이제 다음의 두 자료를 살펴보자. 여성가족부에서 작년 9월 5일에 발표한 ‘국제결혼이민자에 관한 국민의식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 스스로는 다른 문화에 매우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2007년 8월 18일,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 한국사회에 권고한 내용은 한국이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부는 한국사회의 다민족적 성격을 인정하고, 단일 민족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 했으며, “‘순수혈통’ ‘혼혈’ 같은 용어와 여기에 담겨 있을 수 있는 인종적 우월성의 관념이 한국사회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한국인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종차별(다문화)을 해결할 법, 사회적 제도가 미비하며, 이를 개선해야 하겠다는 인식도 불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내 거주 혼혈인 42%가 피부색 등의 인종차별을 이유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조사 결과 또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한다. 한편에서는 다문화사회를 이야기 하면서도 눈앞에서 차별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와 외국인 신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다름 아닌 강한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다문화 사회가 가져다줄 다양성과 풍부함을 꿈꾼다. 그러나 그다지 ‘다문화적’이지도 않고 순혈 담론에 기반을 둔 모노톤(monotone)의 사회가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실재다. 우리는 이러한 비루한 실재를 바꾸지는 않고 말로만 다문화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더 이상 다문화주의가 아니다. 그때의 다문화주의는 사회를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동화 정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문화사회가 아직 충분히 안착하기도 전에 너무 아픈 비판만을 하지는 말아야겠다. 우리사회에서 ‘다문화’는 그 말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다문화사회를 준비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다시 성찰해 볼 기회를 갖게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를 낮추고 상대와 다른 문화,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법 말이다.


다문화사회를 꿈꾸며

20대 초반에 한국에 와서 이제 불혹의 나이를 앞둔 네팔인 친구는 자살을 생각했었노라고 고백한다. ‘젊어서는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조금 모아 놓은 돈은 몇 번씩 한국인에게 사기 당했으며 몸마저 아파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허탈감에 죽으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글라데시인 친구는 15년의 한국살이를 끝내고 곧 고향에 돌아간단다. 여러 번 집에 가려고 공항까지 갔다가 친구들의 만류로 다시 돌아왔지만, 한국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향에 가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5년 동안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이라고, 가서 늦었지만 결혼도 하고 다시 사람구실 하면서 살아야겠노라고 담담히 얘기하는 그에게 우리들은 딱히 건넬 말이 없었다. 만약에 한국이 다문화사회가 된다면, 이주노동자와 외국인 신부들이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려나.


※ 이주노동자를 위한 벼룩시장 : 매주 토요일 홍대역 근처 스트레인지 푸룻에서 2 ~ 6시까지 열린다. (http://cafe.daum.net/s-market)


이선옥사단법인 국경 없는 마을 다문화교육원 연구원을 거쳐 지금은 한양대 다문화연구소 협력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부터 안산시의 이주민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현재는 화성시의 한 이주노동자 단체에서 자원봉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