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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2008 03-04 다문화, 행복한 공존을 꿈꾸다

다문화, 행복한 공존을 꿈꾸다 3 | 마음의 국경을 지우는 곳, 안산이주민센터

에디터 현상필



안산 시화공단, 반월공단과 근접한 원곡동의 ‘국경없는마을’. 이곳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10만 외국인 이주민들이 내 집처럼 너나없이 드나드는 곳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호소하고 한국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자국의 대사관이 아닌 ‘안산이주민센터’의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선다. 


다른 얼굴, 같은 마음

‘이곳의 이방인은 외국인들이 아닌 한국인이다.’ 4호선 안산역 플랫폼을 지나 거리로 들어서자마자 문득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 짙은 갈색피부, 국적이 모호한 뒤섞인 언어들. 주변에는 온통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주민들 뿐인 ‘국경없는마을’의 일상 같은 이 풍경들과 그들이 보내는 낯선 시선을 처음 접하게 되면 누구나 비슷한 느낌을 가질 듯하다. 일요일 정오, 외국인들의 명동이라는 말이 어울리듯 거리는 온통 다국적 풍모의 젊은 남녀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국경 없는 거리 골목 어귀를 도배하듯 들어선 휴대폰 대리점을 지나 잠시 500m정도 걷다보면 3층 건물의 안산 이주민센터(구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박천응 목사)가 눈에 띈다. ‘사단법인 국경없는마을’, ‘코시안의 집’, ‘다문화교회’, ‘안산이주여성상담소’ 계단 벽에 걸린 이름패들이 다양하다. 다문화북카페로 사용되는 1층과 사무국이 들어선 2층은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과 길게 줄을 선 사람들로 인해 북적댔다. 사무부장을 맡고 있는 허연 목사는 “매주 한 번씩 안산한방병원에서 이주민들을 위한 의료지원을 나오고 있으며, 이날은 인근의 한 교회에서도 의료봉사를 나왔다.”고 설명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방문해 사무국 자리까지 내줘야할 만큼 많은 센터를 방문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갔다.

이곳은 노동자들의 상담업무 외에도 인권·복지·교육·친교·국제연대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외국인노동자센터 대신 이주민센터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제한된 기구와 인력으로 많은 기구를 운영하는 데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스텝들은 휴일까지 반납하는 헌신과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실제로 이곳을 찾는 방문자들 대부분이 근로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과 공휴일이 가장 바쁘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봉사자들과 고용주 간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임금체불과 산업재해문제를 비롯해 출입국과 관련한 법률상담, 여성노동자들에게 일어나는 성폭력관련 등의 정보를 나눈다.

이외에도 산업연수생제도, 연수취업제도, 노동허가제 등의 정책문제에도 적극 개입해 근본적인 외국인노동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또 명절과 방학에는 성공적인 한국생활 적응을 위해 성인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국어를 가르치고, 노동자교육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권익과 의무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한 곳에서 많은 활동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안산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의 경우 자국 대사관의 미흡한 도움을 제외하면 외국인 차별이 심한 한국 실정에서 법률, 의료, 교육, 문화적인 지원을 기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허 사무부장은 “앞으로 이주민여성상담소를 비롯한 관련기관을 더 확장할 계획이고 국가지원으로 운영되는 단체들도 더 늘어날 전망이라 여건은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문화교회, 사랑은 종교를 초월하고

3층에 자리한 ‘다문화교회’는 현재 70~80여 명의 이주민 교인들이 출석하고 있다. 외국인 사이에서도 종교적 차이가 심한 코시안들이 교인들이기 때문에 개종을 목적으로 전도와 목회활동을 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교회문화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단다. 서로의 종교관을 존중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교회를 찾을 수 있게 하며, 혹 거부감이 강한 이들에게는 인근의 타 종교 단체를 소개해 그곳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2.5층에는 인터넷 서핑과 PC게임을 즐길 수 있는 컴퓨터실이 들어서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로 국적이 다른 초등학생들이 모여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다섯 살 때 러시아에서 건너왔다는 마지 군(11)에게 인사를 건네자 주변의 아이들이 갑자기 아우성을 친다. 이유를 물으니 “얼굴이 잘생겨 모든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전교에 ‘바람둥이’라는 별명이 퍼졌다”고 한다. 알고 보니 자신들을 제쳐두고 잘생긴 마지에게 먼저 말을 걸어 서운하다 표현이다.


마음의 고향

계단을 내려오니 아래층의 사무국 방 한편에서는 한국어 지도교사들이 수업준비에 한창이었다. 중급반을 맡고 있는 은연옥 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참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주민센터 내에는 수업을 진행할 만한 공간이 부족해 인근의 동사무소로 학생들이 모인다고 했다. 한국어 교실은 동사무소 2층에 마련된 작은 공간을 둘로 나눠 초급반과 중급반을 운영하고 있다. 이날은 한국에 이주한 지 10년이 됐다는 네팔인 에스피 씨가 새로 전입했다. 그는 교우들에게 “한국어능력검정시험에서 높은 등급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날 기온은 영하를 밑돌았지만 난방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이주민 학생들은 수업을 하는 두 시간 내내 몸을 떨어야 했다. 점퍼를 입은 채 손을 비벼가면서도 이들은 시종일관 집중을 잃지 않았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0년 이상을 한국에서 지내온 학생들은 중급자 이상의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은 씨는 “인근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 부족한 상황에서 모든 수업이 무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열의와 출석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에게 잠시 인터뷰를 부탁했다. 2000년부터 한국에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는 야와렛트 쿠와팅(40, 태국) 씨는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닭볶음탕을 맛있게 끓일 줄 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오늘 처음 왔던 에스피 씨하고 제 꿈이 비슷해요. 한국말을 열심히 배워서 태국에 한국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싶어요.” 중국인 서애령 씨(35)는 자매가 모두 한국 사람과 결혼해 친정 식구들까지 이곳에서 모여 살고 있다. “한국에 온지 6년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한국음식을 전혀 못해서 남편이 매일 핀잔을 줘요. 비슷한 문화권이지만 예절문화도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얼마 전부터 친정 부모님이 한국국적을 취득해서 함께 살고 있어요. 그동안 고향에 돌봐드릴 사람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참 다행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중국처럼 1가구 1자녀 제한정책 같은 법이 없는 게 마음에 들어요.”  

두 사람에게 한국에서 받은 차별에 대해 물었다.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각자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단다. 근본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땅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어느덧 이들의 마음속에는 정치적 냄새가 짙은 ‘국가’나 ‘조국’이라는 무형의 국경 대신 새로운 고향으로서의 한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